알키비아데스와 트라실로스는 호흡이 척척 잘 맞았다. 그러나 알키비아데스 부하들과 트라실로스 휘하 장병들의 관계는 껄끄럽고 서먹서먹했다. 예전에 에페소스에서 패전한 경험이 있는 트라실로스를 알키비아데스의 병사들이 노골적으로 무시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트라실로스의 명령과 통제를 받는 새로운 동료들과 심지어 식사와 훈련도 같이하지 않으려 했다.
두 장군의 군대를 화합시켜준 인물은 페르시아의 장수 파르나바조스였다. 알키비아데스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해 허겁지겁 도망쳤던 파르나바조스는 흩어진 병력을 수습한 후 곧장 반격에 착수해 트라실로스의 군대를 곤경에 빠뜨렸다.
알키비아데스는 즉각 구원에 나섰다. 싸움에 능한 파르나바조스도 앞뒤에서 협공하는 알키비아데스와 트라실로스를 동시에 상대하기는 무리인 터라 또다시 패주할 수밖에 없었고, 강대국 페르시아의 내로라하는 장군이 통솔한 군대를 힘을 합쳐 무찌른 사실은 알키비아데스의 병사들과 트라실로스의 장졸들을 단단한 동지애로 묶어주는 접착제 구실을 톡톡히 하였다. 비로소 그들은 명실상부한 원 팀이 되었다.
알키비아데스는 믿었던 티사페르네스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이후로 더는 페르시아에 고마움도, 부채의식도 느끼지 않았다. 파르나바조스는 아테네가 하는 일을 사사건건 방해하며 줄곧 스파르타를 지지해온 자였다. 따라서 그가 다스리는 영지는 아테네군의 우선적 약탈 대상이 되었다.
파르나바조스 다음은 아테네를 배신하고 스파르타에 빌붙은 칼케돈 차례였다. 알키비아데스는 칼케돈을 공략하기에 앞서서 비티니아로 향했다. 그곳에는 칼케돈 시민들이 임박한 전란을 피해 보관해놓은 재산과 귀중품이 막대하게 쌓여 있었다. 알키비아데스는 비티니아 주민들로부터 칼케돈인들이 맡긴 값비싼 재물들을 무상으로 양도받았다. 그 대가로 비티니아가 수중에 얻은 건 몇 글자 안 되는 평화조약 문서였다. 그럼에도 비티니아는 아테네의 화염과 분노(Fire and Fury)를 피해간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파르나바조스는 페르시아인으로서는 매우 드물게 포기를 모르는 남자였다. 그와 그의 군사들은 칼케돈까지 집요하게 따라와 아테네군을 공격했고, 스파르타에서 파견된 지방관 히포크라테스가 이에 호응해 수하들을 이끌고 성 밖으로 출진해 알키비아데스와 트라실로스에게 도전했다. 싸움의 결과는 키지코스 전투의 완벽한 복사판이었다. 페르시아 장수는 도주했고, 무모하면서도 용감하게 싸움을 걸어온 스파르타 태생 지휘관은 부하들과 함께 장렬하게 옥쇄했다.
물 들어오자 노 젓는다고, 알키비아데스는 여세를 몰아 헬레스폰토스 해협 주변 지역 전체를 장악하려 시도했다. 그는 배를 타고 유럽 대륙으로 건너가 셀리브리아 점령을 꾀했는데, 의욕이 지나쳤는지 본대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황에서 성급하게 움직이는 바람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했다. 성 안쪽에서 내응하기로 약조한 세력이 약속시간인 자정보다도 이른 시간에 신호용 횃불을 올린 탓에 겨우 50명의 부하만 데리고 셀리브리아 성문 안으로 난입했던 것이다. 그 50명 중에서 강력한 전투력을 지닌 중장보병은 고작 서른 명뿐이었고, 나머지 스무 명은 빈약한 무장만 갖춘 경장보병들이었다.
셀리브리아인들은 마음만 먹으면 알키비아데스의 선발대를 모조리 몰살시킬 수 있었다, 그렇지만 알키비아데스를 살해할 경우에 아테네인들의 그려낼 잔인한 복수극의 희생양이 될 게 분명했다. 그들은 알키비아데스의 제안을 받아들여 즉석에서 평화협상을 시작했고, 양측의 교섭은 아테네군의 본대가 도착한 직후 완전히 타결되었다.
본대와 합류한 알키비아데스가 결심만 했다면 셀리브리아는 이내 잿더미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알키비아데스는 선의에 선의로 화답했다. 그는 협정의 정신을 충실히 존중하는 차원에서 병력 가운데 트라키아 출신 군인들을 도시 바깥으로 철수시켰다. 알키비아데스 군영에서 종군하는 트라키아 병사들은 주군에 대한 애정과 충성심만큼이나 약탈과 호전성으로도 유명한 터였다.
알키비아데스가 부지런히 전과를 확대하는 사이에 칼케돈을 포위한 아테네 장수들은 파르나바조스와의 단독강화 협상을 개시했다. 협상은 제국의 장수가 약간의 보상금을 받고서 칼케돈의 지배권을 아테네에 반환하면, 아테네군은 그가 관할하는 페르시아 영토를 더 이상은 침략하지 않는 것으로 결론이 도출되었다. 파르나바조스는 이와 더불어 아테네 사절단이 제국의 수도에 가서 페르시아 국왕을 무사히 알현할 수 있도록 그들의 안전통행을 책임지고 보장해야만 했다.
파르나바조스는 알키비아데스 또한 협정에 서명할 것을 주장했다. 알키비아데스는 파르나바조스가 먼저 조약에 조인해야만 한다며 버텼는데, 결국은 양자가 동시에 조약의 준수를 서약하는 것으로 회담은 정리되었다.
아테네를 배신하고 스파르타로 편을 갈아탄 기회주의자들이 득세한 땅은 칼케돈만이 아니었다. 미래에 동로마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로 열방에 명성을 날릴 비잔티온 시도 아테네가 반드시 응징해야만 할 살생부에 들어 있었다.
알키비아데스는 도시를 약탈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비잔티온 측의 항복선언을 수락했다. 그는 항복식이 끝나기 무섭게 이오니아를 목적지로 하여 바쁘게 출항했다. 허나 이는 트로이 전쟁에서 오디세우스가 사용한 가짜 철병 작전을 모방한 눈속임용 책략이었고, 한밤중이 되자 아테네 함대는 항구로 슬그머니 돌아와 수많은 중장보병들을 기습적으로 신속하게 하선시켰다.
알키비아데스는 이번에도 본대에 앞서서 성 안에 잠입하는 데 성공했다. 단지 문제가 있다면 비잔티온인들 역시 아테네 사람들처럼 호메로스의 대서사시이자 서양의 삼국지격인 「일리아드」의 결말을 알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목마를 두고 떠나는 계략에 현혹당해 스스로 성벽을 허문 트로이인들과 달리 맨몸의 무방비상태로 적군을 맞이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