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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춘은 김영삼의 세 번째 아들
  • 공희준 편집위원
  • 등록 2020-12-14 02: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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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영춘의 신간 「고통에 대하여」에 부쳐

상남자 김영삼

 

역시나 YS였다. 김영춘 국회 사무총장의 자전적 에세이집 「고통에 대하여(도서출판 이소노미아)」의 내용에 의하면 야당총재 시절의 김영삼 전 대통령은 새내기 막내 비서인 김영춘의 판단착오로 인해 고려대학교 안암동 캠퍼스에서 굴욕과 수모만 잔뜩 당하는 봉변을 겪었다고 한다. YS는 주군을 냉랭하고 적대적인 시국토론회로 고집스럽게 밀어 넣어 군중으로부터 조롱과 야유소리만 실컷 듣도록 만든 김영춘을 단단히 혼쭐내줘야 한다는 기존 고참 참모들의 격앙된 건의를 김영삼다운 명쾌한 어투로 간단히 일축했다고 한다.


“결정은 내가 했지, 영춘이가 했나?”

 

김영춘 국회 사무총장은 김영삼 전 대통령과의 인연을 그의 책에서 담담하면서도 솔직하게 밝혔다. (사진출처 김영춘 페이스북)때는 1987년 가을이었다. 6월 시민항쟁의 성과물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가 관철된 다음, 김대중과 김영삼 두 사람 가운데 어느 누가 민주정의당 후보인 노태우에 맞서서 야당 후보가 될지를 둘러싸고 동교동과 상도동 사이에 치열한 기세 싸움이 한창 벌어지는 와중이었다. 김영삼보다는 김대중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하기 마련일 학생운동권과 재야세력이 주최한 행사에 참여하면 백이면 백, YS를 향해 불출마를 촉구하는 유무언의 압박이 노골적으로 쏟아질 게 뻔했다. 김영삼 입장에서는 한마디로 호랑이굴로 들어가는 셈이었다.

 

이즈음 김영춘은 아직 20대 중반의 열혈 청년이었다. 자신감과 공명심에 충만했을 나이다. 더욱이 고려대학교는 김영춘이 전두환 정권 아래에서 금지됐다가 어렵사리 부활한 총학생회의 학생회장을 지낸 곳이었다. 김영춘은 YS의 인간적 흡입력과 자기의 사회적 인맥이 효과적으로 결합하면 험악한 장내 기류를 단번에 우호적으로 뒤바꿀 수 있을 것으로 낙관했던 듯하다.

 

미국의 프로복서 마이크 타이슨은 “누구에게나 맞기 전에는 다 계획이 있다”는 전설 같은 명언을 남긴 바 있다. 팔팔한 전성기의 핵주먹 타이슨과 대결했던 선수들마다 전부 나름 치밀하고 정교한 작전계획을 세우고 링 위로 올라갔더랬다. 허나 경기를 준비하면서 수십~수백 번의 반복적 훈련을 통해 체득되었을 필승의 계책은 타이슨의 강펀치 한 방에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고려대에서 망신만 잔뜩 당하고 풀 죽어 상도동으로 돌아올 무렵의 김영춘의 모습은 어쩌면 타이슨에게 힘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서 사각의 링 안에 큰 대 자로 벌렁 드러누운 상대편 복서의 처지와 별반 다르지 않았을지 모른다.

 

김영춘의 선배 참모들은 고려대 시국토론회에 반드시 참석해야만 한다는 미숙하고 까마득한 후배의 주장에 강력히 제동을 걸었다. 계보에 갓 입문한 막내 비서가 쟁쟁한 선배 비서들을 제치고 YS에게 본인의 생각과 구상을 ‘직보’할 수 있었던 데에는 상도동계의 독특하고 개방적인 조직문화가 톡톡히 작용하고 있었다.

 

“너도 비서이고, 나도 비서지 않은가? 네가 직접 이야기해봐라.”

 

상도동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터라 당연히 층층으로 이어지는 위계적 결재라인을 거쳐 김영삼 총재에게 의견을 개진해야만 하는 줄 알았던 김영춘에게 YS의 비서실장이었던 김덕룡 전 평통부의장은 이렇게 쿨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김영춘은 YS를 측근으로서 보좌한 경력의 길고 짧음과 관계없이 참모들끼리는 대등하고 수평적인 관계를 유지했던 상도동의 활달하고 자유스러운 분위기를 그의 책에서 이와 같이 술회했다.

 

김영삼의 리더십이 그립다

 

김영춘의 새 책 「고통에 대하여」에는 저자가 현실 정치인으로 활동하며 직접 경험한 다채로운 인물들의 초상이 입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노태우 전 대통령과 더불어 현대 한국정치사에서 실제의 치적과 성과에 견주어 가장 저평가된 국가지도자로 손꼽힌다. 노태우에게는 군부독재자 전두환과 함께 하나회 군벌 소속의 부도덕한 정치군인이었다는 원죄가 따른다. YS에게는 삼당합당의 과오에 더하여 세간에서 흔히 IMF 사태로 불리는 국제통화기금 관리체제를 초래했다는 주홍글씨가 붙어 있다.


그러므로 호남 지역에서 압도적 지지를 받아온 더불어민주당이 현재의 집권당인 상황에서 YS와의 인연과 상도동계의 미담을 세세히 소개하는 일이 김영춘에게 별로 현실적 이익이 될 것 같지는 않다. 설령 그가 내년 4월에 치러질 부산시장 보궐선거에 여당 후보자로 출마할지도 모른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그럼에도 김영춘이 참모들에게 비겁하게 책임을 전가하지 않았던 YS의 넉넉한 풍모를 활자를 매개로 세상에 알린 건 문재인 정권 임기의 사실상의 마지막 해를 목전에 둔 정치권 전반을 정면으로 겨냥한 심각하고 단호한 문제제기로 해석이 가능하다.

 

정치인의 기본적 역할과 책무는 결단과 책임이다. 그래서 미국의 제33대 대통령 해리 트루만은 “책임은 내가 진다(The Buck Stops Here)!”는 문구가 크고 선명한 글씨체로 쓰인 종이를 아예 액자로 표구해 백악관 집무실 책상에 올려두었다고 한다. 막강한 권력이 주어지는 자리는 그와 동시에 막중한 책임이 부과되는 위치이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권이 말기에 접어든 지금의 한국정치에는 결단하는 사람도 없고, 책임지는 사람은 더더욱 없다. 당장 정부여당부터 무슨 곤란한 일만 생기면 무조건 야당 탓, 언론 탓, 국민 탓만 무책임하고 뻔뻔스럽게 해대기 바쁘다.


국정 최고책임자인 문재인 대통령은 스스로 주도적으로 결단을 내리기는커녕 오히려 남들에게 결단을 다그치는 듣기조차 민망한 삼인칭 유체이탈 화법을 거의 매일 국민들 앞에서 언죽번죽 선보인다. 이제는 집권세력이 마땅히 느껴야 할 부끄러움은 물론이고, 위정자들이 응당히 져야만 올바를 책임마저도 평범한 인민대중의 몫이 돼버린 형국이다.

 

중국 우한에서 발원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의 창궐로 우리나라 국민들은 벌써 1년 가까이 방역이라는 이름의 유사계엄령의 질곡 아래에서 신음해오고 있다. 국민들의 숨이 막히고 가슴이 답답한 이유다.


이 우울하고 절망적인 시국에 김영춘의 신간인 「고통에 대하여」에 기록된 YS의 담백하고 사나이다운 발언과 행보는 그야말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러한 신선한 충격은 김영삼을 일단 마구 비난하며 출발선을 떠나야만 정치적 마일리지가 펑펑 적립되는 작금의 기울어진 운동장 구조에 전연 개의치 않고 YS의 명예회복에 분연히 나선 김영춘의 소신과 당당함으로 말미암아 그 울림과 감동이 배가된다.


김영춘은 상도동에서 일하던 시기에 주변으로부터 별명으로 ‘김영삼의 셋째 아들’이라는 얘기를 들었을 정도로 생전의 YS가 그를 각별히 아꼈다고 회상하면서 김영삼 전 대통령과 끝까지 정치적 동반자로 완주하지 못한 데 대해 진하고 깊은 회한과 아쉬움을 솔직히 토로하고 있다.

 

「고통에 대하여」의 부제는 「1979~2020 살아있는 한국사」이다. 필자는 책에서 드러나는 김영춘의 정책과 노선에 찬동하지 않는 부분이 많다. 그러나 딱 하나, 나를 진심으로 아껴주고 보듬어주었던 사람을 향한 도리와 의리 모두를 최선을 다해 지켜나가려는 김영춘의 노력과 분투에 대해서만은 기꺼이 지지와 격려의 박수를 보내주고 싶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비루하고 약삭빠른 감탄고토(甘呑苦吐)의 얄팍한 처세술이 판치는 작금의 기회주의적인 세태에서 YS라는 써도 너무나 쓴 역사적 인물을 기꺼이 감싸 안는 김영춘의 담대하고 쾌남아적 면모는 더욱더 도드라지게 돋보인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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