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레닌주의의 한계가 586 세대의 한계
공희준(이하 공) : 586 세대 정치인들에 대한 주요한 비판의 지점은 그분들이 권력자들의 등 뒤에 숨어서 정치공학적인 허드렛일을 대신 처리해주는 대가로 잇속을 챙기는 청부정치에 몰두하거나, 또는 유력 정치인들에게 빨대를 꽂고서 단물만 빼먹는 기생정치를 해왔다는 데 있습니다. 청부정치도, 기생정치도 근본적으로는 586 정치인들에게 지속가능한 가치와 노선이 부재한 탓 아닐까요?
신철희(이하 신) : 586 세대 정치인들이 권력의 동향에만 민감하게 반응하다 보니 강자에게 복종하는 습성이 그분들한테 시나브로 체질화한 것으로 보입니다.
공 : 강자에게는 약하면서, 약자에게는 강하면 이른바 양아치인데….
신 : 그분들이 정계에 갓 입문했을 때에는 여느 정치 초년병들과 마찬가지 처지였습니다. 그러니 권력자들에게 줄을 서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겠지요. 철학과 비전 없이 양지만 좇다 보면 자기세력 구축하고, 개인의 금배지 다는 데만 자연스럽게 관심이 가기 마련입니다. 진정한 리더가 되는 일과는, 시대를 앞서가는 지도자로 성장하는 과제와는 양립하기 어려운 정치적 진로를 가게 됩니다.
공 : 소장님께서는 1970년대는 인문학이 정신적 기반이었던 시대였고, 1980년대는 사회과학이 이념의 플랫폼 역할을 수행했던 시기였다고 아주 명쾌하게 진단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1980년대를 풍미했던 마르크스주의와 레닌주의 계열의 사회과학에 여러 가지 중대한 오류와 결함이 내포돼 있었다는 해석도 가능하겠네요? 더욱이 사회과학이라는 용어 자체부터가 이제는 고색창연한 사어가 되다시피 했습니다.
신 : 대학생활을 하면서 보고 듣고 배운 내용은 한 인간의 삶에 두고두고 끈질기게 영향을 미치기 마련입니다. 1980년대의 대학 캠퍼스들에서는 사회주의 성향이 짙은 서적과 저작물들이 전성기를 만끽했습니다. 당시에 한국의 대학가를 주름잡던 사상과 사조들에 적잖은 오류와 오판이 있었음은 지금은 너무나 자명해졌습니다.
공 : 마르크스와 레닌도 성에 차지 않는다고 북한의 주체사상, 즉 김일성주의로 옮겨간 사람들도 꽤 많았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신 : 선배들 가운데에는 북한 체제에 경도된 인물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남한, 곧 한국은 물론 문제가 많은 모순투성이 사회입니다. 게다가 군사독재정권의 폭정 아래에서 오랫동안 고통스럽게 신음했습니다. 그럼에도 권력의 부자세습이 서슴없이 이뤄지는 북한이 현존하는 남한 체제의 대안이 될 수도 없거니와, 되어서도 안 됩니다. 이는 조금만 생각해봐도 쉽게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저는 북한에 우호적인 것도 모자라 그 체제를 찬양하는 건 인간에 대한 이해가 대단히 부족하고, 지극히 편협한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철없는 행동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소련을 위시한 동유럽의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한 지 벌써 30년이 됐습니다. 586 세대가 사회에 진출해 생활인으로 지낸 지도 그와 비슷한 기간이 경과했습니다. 저는 586 정치인들에게 선배세대의 폭넓은 인문학적 교양이 체득돼 있었다면, 현재의 청년세대들처럼 일찍부터 해외로 나가 넓은 바깥세계를 경험할 수 있었다면 그분들이 지금 드러내는 한계과 문제점의 상당 부분은 애당초 생겨나지 않았을 거라고 믿습니다.
공 : 586 세대도 시대의 희생자일 수가 있겠네요.
신 : 예 그렇습니다.
입으로만 반일은 진정한 반일이 아니다
공 : 소장님에게 개인적으로 선배 되시는 분들이 소장님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개량주의자라고, 수정주의자라고, 우편향이라고 비난하지 않나요?
신 : 수정주의면 어떻고, 개량주의면 어떻고, 우편향이면 또 어떻습니까? 이념의 순수성만 추구하다가는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 엉뚱한 결론을 도출할 위험성이 큽니다. 우리나라 서민대중이 직면한 현실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전 세계의 보편적 흐름에 들어맞지 않는다면 어떤 주의주장이라도 그 즉시 수정되고 개량되어야 합니다.
이념적 순수성에 대한 맹목적 집착은 자칫하다가는 오만한 선민사상과 우월의식, 그리고 근거 없는 주관적 독단주의로 변질될 수가 있습니다. 586 세대 정치인들에게 내면화된 그와 같은 선민사상과 우월의식과 독단주의는 반대세력을 향한 그분들의 시종일관 적대적인 태도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정권을 놓고서 자신들과 경쟁하는 정치집단을 향해 보내는 적대적 시선에는 일견 이해해줄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정치를 직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기는 매한가지이니까요. 하지만 자기들을 지지하지 않는 국민들을 대하는 자세마저 적대감으로 가득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면 정치인이 정치인을 공격할 수는 있어도, 정치인이 평범한 유권자들을 겨냥해 날을 세우는 건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공 : 자기를 지지하는 않는 유권자들을 시쳇말로 조져야 자기를 지지하는 유권자들로부터 더 큰 지지와 환호를 받을 수 있다는 얄팍한 계산속이야말로 586 정치의 본질적 특징 아닐까요?
신 : 정치인이 유권자들이 욕망에 눈이 멀었다며 국민들을 가르치려고 드는 건 오만의 극치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자기를 지지하면 착한 국민이고, 자기를 지지하지 않으면 나쁜 국민이라는 생각은 자신들이 국민들의 머리꼭대기 위에 서 있다고 여기는 그릇된 특권의식으로부터 비롯된 왜곡된 인식일 따름입니다.
공 : 남의 욕망을 맹렬하게 비판해온 바로 그분들이 우리 사회 그 누구보다도 더 악착같고 극성스럽게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데 혈안이더라고요. 정말 내로남불하기 짝이 없는 작태입니다. 문재인 정권에 들어와 진보의 대표선수로 나서는 인사들을 보면 거의 모두가 강남에 아파트를 갖고 있고, 자식들은 다 거액의 학비 들여서 외국 특히 미국으로 유학을 갔거든요. 하늘 아래 둘도 없을 위선입니다.
신 : 일본제품 불매운동이 우리 사회에서 한때 뜨겁게 달아올랐었습니다. 제가 특정한 정치적 캠페인이나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호응하고 가담하는 성격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저는 저희 집에 갖다버릴 일제 물건이 있는지 부지런히 찾아봤습니다. 그런데 없더라고요. (웃음) 그래도 솔직히 이실직고하자면 일본자본이 투자했다는 어느 의류 브랜드 매장에 들러 러닝셔츠 몇 벌 싼값에 구매는 했습니다.
공 : 이런 맥락에서는 난닝구라고 지칭해주셔야 분위기가 삽니다. 흐흐흐
신 : 그토록 요란하게 일본제품 불매운동을 전개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의 위정자나 지도층 가운데 자기가 평소에 타고 다녔을 렉서스 자동차를 공개된 장소에 기자들 불러놓고 망치로 신나게 때려 부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공 : 남의 차는 몰라도 내 차는 소중하니까요.
신 : 하려면 철저하게 해야죠. 대충 어영부영으로 할 것 같으면 처음부터 아예 시작하지를 말아야 합니다. 실상을 살펴보면 구호만 요란하지,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물질적으로 손해가 날 것 같은 일은 절대 하려고 들지를 않습니다. 이게 586 세대의 가장 부정적 측면입니다. 본인들의 사회적 입지 강화와 신속한 정치적 약진을 위해서 앞에서 입으로 하는 얘기와, 실제로 살아가는 모습이 달라도 너무나 다릅니다.
공 : 입으로 하는 반일이야 누가 못하겠습니까? 그러니 ‘반일 상업주의’라는 불신과 의심을 국민들로부터 자초할 수밖에요.
신 : 국회의원들과 지자체장들이 입으로 하는 항일운동에 앞장선 양상인데, 구호만 그럴싸하지 우리가 일본을 진짜로 넘어서는 데 필요한 희생과 헌신은 그저 남들 몫일 뿐입니다.
공 : 고상한 우리는 실내에서 입으로 편안히 싸울 테니, 천한 너희들은 현장에서 몸으로 힘겹게 싸우라고 대놓고 부추기는 꼴이네요. (④회에서 계속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