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은 지금부터 약 2천 년 전 완성된 책이다. 세월의 풍상을 이기지 못하고 망실된 부분이 당연히 존재할 수밖에 없다. 폭군의 대명사로 통하는 네로에 관한 기록도 후세에 전승되지 못한 걸로 추정되고 있다. 플루타르코스가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BC 3년~AD 69년)를 다루기에 앞서서 네로를 언급한 것처럼 글을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네로가 진짜로 로마에 불을 지른 다음 불타는 도시의 광경을 한가로이 바라보며 작은 현악기의 일종인 수금을 타면서 시를 읊었는지는 정확한 확인이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네로가 이집트로 황급히 도주할 계획을 세웠을 만큼 초읽기에 몰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황제의 안전을 책임진 근위대마저 모반에 가담하자 네로에게는 도망조차 사치였다. 그는 스승인 세네카 같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세네카에게 자살을 강요했던 인물은 다름 아닌 네로 본인이었다. 자살을 결행할 당시의 네로는 한국식 나이로 겨우 서른두 살이었다.
근위대장 님피디우스 사비누스와 티겔리누스는 네로가 여전히 번연히 살아 있는 상황에서 갈바를 황제로 선포했었다. 두 근위대장의 집요한 독촉에 굴복한 갈바는 근위대를 비롯한 로마군 병사들에게 엄청난 액수의 포상금을 약속했는데, 이는 현실적으로 이행이 불가능한 공약이었다.
갈바는 이 터무니없는 대중영합적인 약속에 발목이 잡혀서 결국에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 불굴의 의지와 탁월한 용기로 조국에 광활한 영토와 찬란한 영광을 안겨주었던 로마의 군대는 마치 경매에서 물건 값을 부르듯 더 많은 금전을 제시하는 인물들의 꽁무니를 저렴하게 따라가며 수시로 충성의 대상을 바꾸는 변덕과 배신의 온상으로 전락했다. 개개의 병사들 나름으로는 개인의 이익에 충실한 ‘전략적 선택’을 내린 셈이었겠지만, 이와 같은 신의 없고 지조 없는 행동은 한때 명예를 목숨보다도 소중히 여겼던 로마군 전체를 세상의 웃음거리로 만들어버렸다.
강화도령으로도 불리는 조선왕조의 철종 임금처럼 남들에게 등 떠밀려 옥좌에 오르기는 했으나 갈바는 철종과는 달리 초라한 배경을 가진, 시쳇말로 근본 없는 인간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갈바는 돈이 많았다. 그는 플루타르코스가 아는 범위 안에서 그때까지 로마의 황제로 등극한 사람들 가운데 단연 부자였다. 더욱이 그는 전통의 명문귀족인 세르비우스 가문의 일원인 데다가,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즉 옥타비아누스의 부인인 리비아 황후와는 혈연관계이기도 했다. 갈바는 리비아의 추천을 받는 ‘친척 찬스’ 덕분에 집정관에 임명될 수가 있었다.
이쯤 되면 후세인들은 갈바를 운과 줄로 출세한 전형적인 금수저로 생각할 수도 있으리라. 그런데 갈바는 능력과 인품 면에서 빠지는 구석이 없었다. 그는 로마의 최전방 지역인 게르마니아의 군단 지휘관으로서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했고, 아프리카 속주에서는 행정의 달인으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다. 낭비벽이 심한 네로와는 정반대로 소박하고 검소한 생활로도 명성이 높았다.
갈바는 황제가 되기 전에 마지막으로 맡은 관직이었던 히스파니아 총독으로 재임하면서는 신중하고 자애로운 성품으로 현지 주민들 사이에 그에 대한 칭송이 자자했다. 그는 네로가 파견한 대리인들이 중앙정부의 폭정을 비판하는 지방 민심을 무리하게 억누르려고 시도하자 황제 측근들과의 공공연한 마찰을 불사하면서까지 주민들 편을 든 데서 증명되듯이 부당한 권력에 소신 있게 맞서는 강단과 의협심도 아울러 갖추고 있었다.
로마는 작은 정부를 신봉하는 국가였다. 한마디로 세금을 적게 걷는 나라였다. 집권 초기의 네로는 현대의 관세에 해당하는 조세의 과감한 철폐를 추진할 정도로 촉망받는 개혁군주였다. 허나 집권 말기에 들어서자 그는 속주를 중심으로 증세 정책을 밀어붙였다. 황제 자신의 씀씀이도 컸지만, 결정적 원인은 불탄 로마를 재건하는 일 같은 대규모 토목사업에 필요한 재원을 충당해야만 하는 데 있었다.
매에는 장사가 없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급격한 증세는 정권의 몰락을 여지없이 초래한다. 오늘날의 사가들은 고대 로마의 대화재가 네로의 방화 탓에 발생했다는 가설을 더는 신뢰하지 않는다. 네로가 도처에서 화염이 치솟는 시가지를 구경하며 노래를 불렀다는 주장도 신빙성이 떨어지는 소리로 평가하고 있다.
핵심은 도시의 거의 전역이 홀라당 불에 타버린 로마를 부흥시키려는 과정에서 네로가 어쩔 수 없이 단행했을 세금 인상 조치가 가뜩이나 좋지 않았던 속주의 민심을 완전히 이반시켰다는 사실에 있다. 네로가 아직은 신흥종교였던 기독교를 박해하면서 그리스도교 신도들을 「쿠오바디스」에서 형상화된 모습대로 잔인하고 엽기적으로 학살한 사건은 가뜩이나 악명 높았던 그의 평판을 더욱더 실추시켰다.
세금폭탄을 맞은 속주에서의 반란은 단지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관심사항이라면 누가 제일 먼저 동을 뜨느냐는 것이었다. 최초로 깃발을 올린 주인공은 갈리아 주둔 로마군 사령관 유니우스 빈덱스 장군이었다. 빈덱스는 거사에 동참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의 편지를 여러 속주의 총독들에게 발신한 터였다. 대부분의 총독들은 빈덱스의 서찰을 네로에게 곧바로 보내며 단호하고 신속한 진압을 진언했다. 갈바는 예외였다. 그는 편지를 네로에게 전달하지 않고 수중에 보관하고서 사태의 추이를 예의주시했다.
빈덱스는 갈바에게 또 다른 편지를 발송해 갈리아와 이베리아 연합군의 총수가 되어달라고 간곡히 부탁하면서 갈리아 지방에서 봉기한 반란군의 군세가 대단히 막강하다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그러자 이제껏 조심스러웠던 갈바의 마음이 조금씩 흔들리게 된다. 그는 근위대 수뇌부로 밀사를 파견해 네로에게 계속 충성하는 게 옳은지를 물었고, 근위대장 비니우스는 그러한 질문을 하는 처신 자체가 이미 역심을 품은 증거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답변함으로써 켕기던 갈바의 정곡을 제대로 찔렀다.
근위대장은 군인이기 이전에 정치인이기 마련이다. 비니우스에게 속내가 들킨 갈바는 즉시 세 불리기에 나섰다. 그는 노예들에게 신체의 자유를 부여하는 법령을 선포함으로써 전쟁의 성격을 불경스러운 제위찬탈 전쟁으로부터 거룩한 노예해방 전쟁으로 순식간에 전환시켰다. 북부의 공장주들과 남부의 농장주들 간의 무력충돌을 노예해방 선언을 발표해 연방의 유지와 보편적 인권 실현을 위한 정의로운 투쟁으로 그 틀(Frame)을 단숨에 전환시킨 미국의 제16대 대통령 링컨을 방불하게 하는 노련하고 명민한 정치기동이었다.
갈바는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성급히 칭제하는 대신에 자기를 원로원의 합법적 수장이자 시민군의 정당한 사령관으로 호명했다. 원로원의 합법적 수장 겸 시민군 사령관에 취임한 갈바는 네로에게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훌륭한 동료 로마인들을 추념하며 그들의 명예를 반드시 회복시켜주겠다고 엄숙하게 선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