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민 전 대표가 당내 불신의 상당 부분 제공해
공희준 (이하 공) : 김관영 바른미래당 원내대표가 결국 사퇴했습니다. 그런데 사퇴하는 장면이 웃기고도 슬픕니다. 바른미래당 소속 현역 국회의원들로부터 내년 총선에 기호 3번을 달고 출마할 것이라는 엄숙한 공개맹세를 받은 다음에 원내대표 자리를 내놨기 때문입니다. 그 약속, 과연 지켜질 수 있을까요? 정치인들의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게 아니라 뒤집으라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위의 질문이 끝남과 동시에 필자와 장진영 위원장, 그리고 동석한 김대희 사진기자 세 사람은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왜 3인이 동시에 파안대소했는지 그 동기와 맥락은 여전히 아리송하다.
장진영 (이하 장) : 첫 번째 질문부터 왜 이렇게 센가요? (잠시 뜸을 들인 다음) 말씀하신 약속은 여러 정치인들이 국민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약속한 서약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런 중대한 약속을 어느 누가 감히 깰 수가 있겠습니까? 약속에는 깰 수 있는 약속도 있고, 깰 수 없는 약속도 있습니다. 바른미래당 국회의원들의 오늘의 결의는 당연히 후자에 해당합니다.
바른미래당의 갈등은 개인전 차원의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이를테면 유승민계와 손학규계가 대립하는 단체전 수준의 쟁투였습니다. 따라서 이번 약속은 개인적 약속이 아닙니다. 집단의 명예를 걸고서 국민들에게 한 약속입니다. 제가 김관영 원내대표의 사퇴 직후에 바른미래당 의원들이 행한 맹세가 확고한 구속력이 있다고 보는 이유입니다.
저는 유승민 전 공동대표께서 당내에 불신이 만연하게 된 사태의 원인을 상당 부분 제공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유승민 전 대표가 바른미래당을 접수한 다음에 자유한국당으로 갈 것이라는 추측과 의심이 당내에 팽배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승민 전 대표만 불신을 받은 건 아니었습니다. 손학규 대표께서도 불신을 샀습니다. 손학규 대표가 민주평화당과 합친 후에 호남당을 만들 것이라는 의구심을 유승민계에서 계속 품어왔거든요.
그러한 불신이 곧바로 상대를 공격하는 무기가 되고 프레임이 돼왔습니다. 당내에 만연한 상호 간의 불신은 많은 당원과 지지자들을 힘들고 피곤하게 만들어왔습니다. 바른미래당의 지지율을 깎아먹는 원인으로 작용해왔기도 하고요. 만인의 만인에 대한 불신이 난무하는 상태에서는 당의 생존 자체가 불투명했으니까요. 오늘 오후의 결의는 이러한 불신과 불투명성을 해소했다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공 : 신속처리안건(일명 패스트트랙)에 상정된 선거법과 공수처법의 구체적 내용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국민들이 잘 모르고 있습니다. 솔직히 관심도 없고요. 그럼에도 너무나 쉽게 이해되는 그림이 있었습니다. 바른미래당이 집권여당인 더불어민주당과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의 대리전을 치르는 곳처럼 되었다는 점입니다. 6‧25 전쟁 시기에 한반도가 미국이 견인하는 자본주의 체제와 소련이 정점에 선 공산주의 진영의 싸움터가 된 것처럼요. 바른미래당이 결코 약소한 군소정당은 아닙니다. 이름만 걸고 있을 뿐, 당에 나오지 않는 분들을 제외해도 현역 의원의 숫자가 30명에 육박하는 어엿한 원내교섭단체입니다. 국가에 비유하면 중진국 정도 되는 이 정당이 왜 남의 전쟁을 대신 치러주는 당으로 돼버린 건가요?
장 : 어떤 관점에서는 대리전 싸움터로 보일 수가 있겠죠. 그러나 저는 시각을 달리해보고 싶습니다. 바른미래당이 이번에 신속처리안건 정국에서 제대로 캐스팅 보트 역할을 수행했다고 평가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화끈하게 싸우고 확실하게 승복하겠다
공 : 캐스팅 보트 역할을 했다는 건 칼자루를 쥐었다는 뜻인데, 어째서 칼자루 쥔 사람이 외려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고 있나요? (웃음)
장 : (골똘히 고민하고서) 그건 정말 웃기는 일이었습니다. 바른미래당 안에는 크게 두 가지 흐름이 존재합니다. 국민의당에 몸담았던 분들과 바른정당 출신인 분들이 바른미래당의 진로에 관해서 다른 견해를 갖고 있는 까닭에서입니다.
첫 번째 흐름은 자유한국당을 대체하겠다는 흐름입니다. 바른정당에 계셨던 분들이 주로 이런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두 번째 흐름인 국민의당에서 활동했던 분들의 의견은 이와는 다릅니다. 그분들은 자유한국당은 물론이고 더불어민주당 역시도 구태 기득권 정당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므로 국민의당 출신 인사들은 바른미래당은 새로운 정치세력이 주도하는 개혁적 신당이 돼야 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당연히 다당제의 유지와 정착이 필수이고요.
저는 두 흐름 가운데 어느 것은 옳고, 어느 것은 틀렸다고 이분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두 흐름 모두 각자의 역사적 의의와 필요성이 있다고 봅니다. 따라서 저는 이 두 정파가 제대로 노선투쟁을 전개한 다음 노선투쟁에서 승리하는 쪽이 선명한 색깔과 단단한 방향성을 지니고서 당을 이끌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공 : 위원장님이 추구하는 노선이 당의 공식 입장으로 관철되지 않아도 기꺼이 승복하겠다는 말씀인가요?
장 : 예, 그렇습니다. 당연히 승복해야죠. 저는 다당제 실현이 올바른 역사적 대의이자 목표라고 확신합니다. 그렇지만 자유한국당을 거꾸러뜨리고 그를 대신할 개혁적 보수정당의 출현 또한 나름의 가치와 의의가 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바른미래당을 자유한국당을 대신하는 정당으로 자리매김을 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당내 노선투쟁에서 승리해 당권을 차지했다면 제가 지향하는 노선은 아니더라도 승복해야죠. 그건 틀린 길이 아닌, 다른 길일 뿐이니까요.
공 : 그런데 지금 바른미래당의 상황은 자신들이 부르짖는 노선이 승리하지 못하면 당에서 아예 나가겠다는 분위기 아닌가요?
장 : 그건 아닙니다. 탈당하겠다는 식이었으면 이번 갈등이 극적으로 봉합이 됐겠어요? 이번에 유승민 계가 반기를 들었다가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한마디로 반란에 실패했습니다. 저는 애초에 나갈 생각이 없으니까 백기를 들었다고 봅니다.
진심으로 의심했기에 진심으로 화합할 수 있다
공 : 유승민 계의 반란이 예상외로 싱겁게 끝났습니다.
장 : 저는 바른정당 계열 분들이 약간은 순진한 생각을 갖고서 반란에 나섰다고 봅니다. 당 지도부를 무리하게 인위적으로 끌어내리려고 했으니 일단는 반란이라고 일컬어야죠. 그런데 손학규 대표가 예상외로 강력한 결기를 보여줬습니다. 손학규 대표께서 아주 완강하게 버티셨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김관영 원내대표의 사퇴는 양측이 일종의 타협에 도달한 결과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저는 김관영 원내대표의 사퇴 결단이 돌파구가 되어 국민의당 출신들과 바른정당 출신들 사이의 뿌리 깊은 상호 불신이 해소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공 : 뿌리 깊은 불신이라면 어떤 불신을 가리키나요?
장 : 국민의당 출신 입장에서 말씀드리자면 바른정당 출신 분들이 자유한국당과 합칠 것이라는 의심이었습니다. 이 의심은 상대를 공격하는 데 동원되는 단순한 수사적 프레임이 아닙니다. 진심어린 의심이었습니다.
공 : 진심어린 의심이라….
진심을 갖고서 하는 의심은 권투경기에 비유하자면 체중이 실린 펀치와 같다. 장진영 위원장은 수요일 오후의 막판 타협을 바른미래당이 진정한 통합과 단결에 도달하는 과정에서의 의미 있는 진전이라고 추켜세웠다. 그러나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듯 필자 같은 외부인들은 좀 더 두고 보자는 쪽일 듯싶다.
장 : 바른정당에 계셨던 분들도 국민의당에 계셨던 분들을 향해 진심어린 의심을 거두지 않아오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분들은 국민의당계가 민주평화당과 재결합해 호남 기반의 지역정당으로 갈 것이란 두려움에 휩싸여왔습니다. 바로 이 부분이 오늘로써 말끔하게 해결된 겁니다. 자유한국당과 연대해야만 한다는 요구도, 민주평화당과 통합해야 한다는 주장도 더 이상 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 곧장 해당행위로 간주될 테니까요.
공 : 설령 해당행위를 저질렀다고 해도 당에서 취할 수 있는 마땅한 제재수단이 현실적으로 없지 않습니까?
장 : 왜 없어요? 많지.
공 : 얼마 전 탈당한 이언주 의원처럼 자기 스스로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을 당에서 만들면 되겠네요.
인터뷰의 무게중심은 현안 진단으로부터 구조적 분석으로 차츰차츰 넘어가기 시작했다.
공 : 우리나라는 대통령 중심제를 채택한 나라입니다. 게다가 대통령을 국민 직선으로 선출해왔습니다. 이 영향으로 말미암아 유력 대권주자가 건재한 정당은 웬만해서는 깨지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바른미래당은 굉장히 특이한 사례에 속합니다. 2년 전 봄의 대통령 선거에서 당시 안철수 후보와 유승민 후보가 얻었던 표의 숫자를 합치면 거의 천만 표에 근접합니다. 국민들이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대선주자가 바른미래당에는 벌써 2명이나 있습니다. 더욱이 손학규 대표도 요즘 노익장을 과시하고 계시니 대권주자가 셋일 수도 있고요. 그럼에도 바른미래당은 대선주자가 없는 이른바 식물정당처럼 이리 차이고 저리 채이는 동네북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왜 그런가요? 대권주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불안정한 정당은 바른미래당이 처음인 느낌이거든요.
장 : 저는 역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권주자가 너무 많기 때문에 불안정한 것이라고요. 바른미래당은 특정한 한 사람이 확실하게 당의 주도권을 장악한 정당이 아닙니다. 엇비슷한 체급의 분들끼리 자웅을 겨루는 구조입니다. 단적으로 대선에서의 3등 후보와 4등 후보가 지금 우리 당에 나란히 계십니다. 만약에 1등과 3등이 있는 당이라고 가정해보세요. 그럼 1등이 주도권을 꽉 틀어쥐고 있을 겁니다.
대통령 선거에서의 등수만 비슷한 게 아닙니다. 세력도 비등비등합니다. 당장 원내 의석의 분포만 살펴봐도 병력은 국민의당계가 보다 많지만, 화력은 바른정당계가 더 막강합니다. 세력균형은 양날의 칼입니다. 안정을 보장해주는 안전판이 될 수도 있고, 끊임없이 흔들림을 가져오는 롤러코스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아쉽게도 바른미래당의 현재 상황은 뒤편에 가깝습니다. ②편에서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