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로피다스가 목숨을 잃을 동안 에파미논다스는 어디서 무엇을 했단 말인가?”
독자들로서는 응당 이와 같은 의문을 품을 법하다. 펠로피다스와 에파미논다스는 평생의 동지였다. 그런데 플루타르코스는 펠로피다스를 주연 역할로 내세우면서도 에파미논다스는 주인공을 빛내주는 비중 있는 조연 정도로 처리했다.
필자는 그 까닭을 두 사람이 담당한 전역이 다르다는 사실에서 찾고 싶다. 레욱트라 전투는 그리스 내부의 동맹관계를 발본적으로 재편시켰다. 신흥 패권국가로 등장한 테베에 대항해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구원을 떨치고 서로 손을 잡았다. 어제는 친구였던 테베와 아테네는 오늘은 적이 되었다. 문제는 아테네를 격퇴하는 책무를 에파미논다스가 떠안았다는 점이었다. 아테네의 역사와 전통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이 남다른 플루타르코스가 에파미논다스의 위상과 족적을 깎아내릴 수밖에 없었던 배경이다.
테베는 남북 양면에서 동시에 전쟁을 치렀다. 여기에서 주된 전장은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동맹군을 대적해야만 하는 남부전선이었다.
펠로피다스가 에게 해를 건너 소아시아 반도를 지나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를 찾아간 기본적 동기는 페르시아가 아테네와 스파르타 연합에 가담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아르타크세르크세스로부터 받아두는 데 있었다. 페르시아까지 다녀왔던 펠로피다스는 테베군의 주력이 남부전선에 장기간 고착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소수의 용병 기병대만을 이끌고 테살리아로 북상했다가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남쪽 싸움터에서 복무하는 테베군 장병들의 대열에는 에파미논다스도 끼어 있었다. 그는 직권남용 혐의를 둘러싼 재판에서 비록 무죄를 선고받기는 했으나 백의종군을 해야만 하는 우여곡절을 겪은 후에야 가까스로 지휘관의 신분을 회복한 터였다. 그가 친구의 장례식에 참석했는지 여부에 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그의 가장 절친한 맹우이자 제일 강력한 후원자인 펠로피다스가 목숨을 읽은 지경에서는 에파미논다스가 잠시도 임지를 벗어나기 어려웠을 것으로 필자는 신중하게 추정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친구의 분묘가 조성된 북쪽을 애통하게 몇 번이고 바라보며 피눈물을 쏟아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에파미논다스는 역시나 미래지향적인 진취적 기상과 강건한 불굴의 의지를 지닌 영웅적 사나이였다. 그는 죽은 친구의 유지를 계승하자는 구실을 내세우면서 자신의 정치적 이득을 꾀하는 퇴행적이고 이기적이며 구태의연한 유훈정치는 찰나조차 시도하지 않았다. 그는 몸은 수천 년 전 고대인이었으되, 마음은 진정한 현대인이었다.
펠로피다스의 목숨을 느닷없이 앗아간 키노스케팔라이 전투가 벌어진 지 2년 후에 에파미논다스 역시 친구의 곁을 따라가게 된다. 그가 아테네와 스파르타, 그리고 만티네이아의 세 나라가 구성한 연합군과의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했기 때문이다.
만티네이아는 과거에 에파미논다스가 펠로피다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서 함께 싸웠던 땅이었다. 서기로 기원전 362년에 바로 이 만티네에아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테베는 피비린내 나는 혈전 끝에 승리를 거머쥐었다. 에파미논다스를 위시한 대다수의 노련한 장수들을 승리의 대가로 내어준 상처뿐인 영광이었다. 테베는 겨우 2년의 간격을 두고서 두 차례나 실속 없는 외화내빈의 피로스의 승리를 거둔 셈이다.
펠로피다스와 에파미논다스의 잇따른 불의의 죽음은 오랫동안 도광양해해온 북방의 다크호스에게 나중에 어마어마한 어부지리를 안겨주게 된다. 행운의 주인공은 테베에서 볼모 신분으로 생활하며 동서고금의 각종 전쟁사와 그리스의 최신 전략전술들을 열심히 연구해간 마케도니아 왕국의 유망주 필립포스 2세였다.
에파미논다스는 평생을 가난한 독신으로 살면서 나라를 위한 일이라면 백의종군의 수모와 굴욕마저 기꺼이 감수했다. 에파미논다스의 업적과 활약을 의도적으로 축소한 아테네 사람 플루타르코스와 달리 로마인 키케로는 그를 당대 최고의 그리스인으로 추켜세웠다. 이는 로마가 테베에 별다른 억하심정이 없었던 덕분이었다.
그렇다면 누가 펠로피다스의 원한을 풀어줬을까? 일단은 조국인 테베가 먼저 보복에 나섰다. 테베는 7천 명의 보병과 7백 명의 기병으로 이뤄진 부대를 급히 편성해 테살리아 지방으로 전진시켰다.
페라이의 무뢰한은 키노스케팔라이에서 이미 크게 타격을 받은 터라 테베군은 손쉽게 테살리아 지역을 자국의 세력권 안에 다시금 확실히 편입시킬 수가 있었다. 그러나 테베군은 무리하게 페라이를 공격하지 않았다. 아니, 굳이 그릴 필요가 없었다.
알렉산드로스의 아내 테베는 남편에 대한 애정이 오래전에 식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없었는지도 모른다. 고대에는 연애결혼이라는 개념 자체가 아예 없었던 탓이다. 페라이의 감옥에 갇혔던 펠로피다스의 집요한 속삭임과 부추김은 가뜩이나 애정 없는 두 사람의 부부관계를 완벽한 파탄에 이르게 하는 촉매제로 작용했다.
사랑하지 않는 남편과 백년해로할 의사가 터럭도 없었던 왕비는 세 명의 오빠와 국가의 진로와 가족들의 거취를 논의했다. 자칫하다가는 왕비와 그녀의 친정에 더하여 나라 전체까지 독기 오른 테베 군병들이 펼쳐갈 잔혹한 복수전의 희생양이 되어 완전히 결딴날지도 모를 판국이었다. 오누이들은 알렉산드로스의 목으로 테베의 자비와 관용을 구하면서 왕비의 불행한 결혼에도 깔끔하게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일석이조의 음모를 꾸미기로 선택했다.
알렉산드로스의 침실은 참주 내외와 개를 사육하는 시종, 그리고 이들 3인의 말에만 고분고분 순종하는 사나운 맹견 한 마리만이 자유롭게 출입이 가능했다. 폭군의 아내는 그녀의 세 오라비, 즉 티시포노스와 피톨라오스와 리코프론이 경비병들의 삼엄한 눈길을 피해 아래층의 어느 작은 방에서 몰래 대기하도록 했다. 경비병들은 침실이 자리한 위층에서는 왕의 숙면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경계를 서지 않고 있었다.
왕비는 여러모로 기분이 뒤숭숭한 왕이 잠을 푹 자야만 한다며 시종과 개를 밖으로 내보낸 후에 계단과 복도바닥에 푹신한 털가죽을 깔았다. 오빠들이 발소리가 나지 않게 침실의 출입구까지 접근할 수 있도록 하려는 용의주도한 배려였다. 오라비들이 방문 앞에 당도하자 왕비는 왕이 누가 업어 가도 모를 만큼 인사불성으로 깊이 잠들었음을 증명하려는 목적에서 알렉산드로스가 평소 머리맡에 습관적으로 놓고 자는 커다란 검을 손으로 꺼내 침실 바깥으로 가져왔다.
그렇지만 막상 거사를 실제로 행동에 옮길 단계에 다다르자 되레 남자들이 겁에 질려 몸을 사렸다. 꼭지가 반쯤 돈 왕비는 당장에 남편을 죽이지 않으면 소리를 질러 잠자는 폭군을 깨우겠다고 오빠들을 위협했다. 부부는 닮는다고 그녀는 어느새 남편만큼이나 독하고 무자비한 성격으로 변해 있었다.
여동생의 서슬 퍼런 겁박에 화들짝 놀란 세 명의 소심한 오라비들은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이판사판의 심정으로 한 사람은 왕의 다리를 붙잡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왕의 머리를 누르고, 나머지 한 사람은 왕의 심장에 깊숙이 칼을 찔러 넣었다.
암살로 인해 죽음을 맞이한 군주들과 통치자들은 이전에도 수없이 존재해왔다. 그들 가운데 믿었던 아내에게 허를 찔린 인간은 페라이의 참주가 처음이었다. 플루타르코스는 이를 두고 알렉산드로스가 그동안 저지른 잔인무도하고 불법적인 온갖 악행에 대한 천벌을 인과응보로 받았다며 무척 통쾌해했다. 지긋지긋한 폭정으로부터 마침내 해방된 백성들이 폭군의 차가운 주검을 욕보이는 장면에서 역사가가 느낀 후련함이 배가되었음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