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Marcus Licinius Crassus)는 서력으로 기원전 115년경에 태어나 역시나 기원전인 53년에 죽었으니 그는 로마가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이행할 무렵의 시대를 살았던 셈이다. 이때는 로마의 국경을 전면적으로 침범할 만한 외부의 위협적 강적은 카르타고를 끝으로 벌써 다 소멸한 상태였다. 외적이 사라지면 그 대타로 내부에서 적을 찾아야만 하는 법이다. 크라수스가 활동했던 시기의 로마는 안에서 자기들끼리 서로 잔혹하게 죽고 죽이는 반란과 내전의 소용돌이 속으로 차츰차츰 빨려들어가게 된다.
크라수스의 아버지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감찰관직을 지내고 개선행진까지 벌였던 인물로 로마인의 미덕인 검소함과 질박함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다. 청렴한 푸블리우스는 아들들에게 별다른 재산을 물러주지 못했고, 이로 말미암아 그의 자식들은 장가를 간 후에도 선친의 거의 유일한 유산일 작은 집에서 처자식들을 데리고 함께 살아야만 했다.
3형제 가운데 막내인 크라수스는 이러한 궁핍한 생활에 겉으로는 큰 불만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두 형들 중에서 한 명이 죽자 로마의 전통적 관습에 따라 남편을 잃은 형수와 결혼해 슬하에 자식까지 두며 단란한 가정을 이뤘다. 그러다가 마침내 대형사건이 터졌다. 크라수스가 베스타 여신을 모시는 신전의 여자 사제와 통정했던 것이다.
로마사회에서 여성 성직자는 남성과의 육체적 접촉이 당연히 불허되었고, 여사제와 부도덕한 금지된 장난을 저지른 사내는 당연히 중벌을 면하지 못했다. 플루타르코스는 착하고 성실했던 청년 크라수스가 왜 이러한 파렴치한 범죄에 연루되었는지 그 이유를 소상하게 설명하지 않고 있다. 필자는 크라수스가 가정에서의 모습과 집밖에서의 면모가 완전히 다른 두 얼굴의 사나이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조심스럽게 추측하고 있다. 이를테면 밖에서 거친 주먹질을 일삼는 건달들이 집에만 돌아오면 온화한 가장으로 급변하곤 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엄청난 반전이 숨어 있었다. 크라수스는 사랑하는 가족의 행복을 위해 여사제와의 염문을 마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크라수스와 부적절한 불륜관계를 맺은 신녀의 이름은 리키니아였는데, 그녀는 로마 교외에 넓고 쾌적한 고급 저택을 소유하고 있었다. 크라수스는 이 저택을 탐내고 의도적으로 리키니아에게 연애를 걸었던 터였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신녀와의 몰래 데이트가 들통 났다는 점이었다.
여기서 또다시 운명의 반전이 일어난다. 크라수스가 사랑이 아닌 돈을 목적으로 리키니아에 접근했다는 사실이 되레 정상참작의 사유로 작용하면서 그가 무죄판결을 받았던 것이다. 결과보다는 동기를 중시하는 로마의 독특한 법체계가 그를 살렸다고 하겠다. 이런 요란하고 수치스러운 소동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크라수스는 리키니아와의 내연관계를 당장에는 정리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목표했던 부동산을 마침내 손에 넣고 난 다음에야 신녀와의 위험천만하고 아슬아슬한 정분을 끝냈다. 돈만 된다면 무슨 짓이든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는 인간이 바로 크라수스였다.
그와 같은 무지막지하고 후안무치한 탐욕 덕분에 크라수스는 미국의 유명한 경제잡지인 포브스에 의해 5천년이 넘는 인류사를 통틀어 역대 8번째 부자로 선정될 수가 있었다. 그의 재산은 2016년 기준으로 계산하면 1,698억 달러에 이르렀던 것으로 평가된다. 작년인 2019년에 대한민국 최고의 부자로 발표된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재산은 크라수스가 보유했던 전체 자산의 10분의1 크기에 불과한 총액 168억 달러로 집계되었다. 현재의 우리나라 원화 가치로 환산하면 20조 원에 약간(?) 모자란 수준이다.
크라수스는 무늬만 금수저일 뿐이었다. 물려받은 재산이 없다시피 한, 내용상으로는 흙수저였다. 그렇다면 크라수스는 도대체 어떤 방법을 썼기에 당내의 로마인들은 물론이고 후대의 전 세계인들까지 놀라움과 부러움으로 입을 쩍 벌리게 만드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부를 일궈낸 것일까? 그 비밀은 잇따른 전쟁과 끊이지 않는 국가적 재난에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큰 부자는 난세를 틈타서 출현하기 마련이다. 나라가 혼란에 휩싸일 적마다 크라수스는 보통의 인민대중은 상상하기조차 힘든 천문학적 액수의 소득을 벌어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