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원로원은 렌툴루스의 패전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두 명의 집정관으로부터 군대 지휘권을 박탈하여 이를 크라수스에게 맡겼다. 새로 총사령관에 부임한 크라수스는 부지휘관으로 임명된 뭄미우스에게 2개 군단을 내어주어 스파르타쿠스를 저지하도록 했다.
뭄미우스는 신중하게 대응하라는 크라수스의 명령을 어기고 스파르타쿠스의 군대와 성급하게 교전을 벌였다가 대패하고 말았다. 대노한 크라수스는 뭄미우스를 엄중 문책한 다음 전장에서 비겁하게 도망친 500명의 병사들을 로마 군법에서 최고의 극형인 ‘10분의 형’에 처했다. 이는 10명 가운데 무작위로 1명을 뽑아 사형에 처하는 형벌이었다. 사람 좋은 줄로만 알았던 크라수스가 뜻밖에 단호한 면모를 보이자 그동안 군기가 느슨해질 대로 느슨해졌던 로마군 진영은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는 결사항전의 분위기로 순식간에 돌변했다.
스파르타쿠스는 독이 오른 진압군과의 정면대결을 피해 남으로 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메시나 해협은 이탈리아 본토와 시칠리아 섬을 나누는 물길로 가장 폭이 좁은 곳이 1.9km에 불과하다. 허나 아무리 좁은 해협일지라도 부녀자와 노인, 그리고 아이들까지 포함됐을 수만 명의 무리가 헤엄을 쳐 건널 수는 없는 노릇이다.
플루타르코스는 해협에 다다른 스파르타쿠스가 킬리키아에 근거지를 둔 해적들과 우연히 조우한 것처럼 묘사하였다. 킬리키아는 현재의 터키 남해안 지방을 일컫는다. 그렇지만 봉기한 노예들과 무법자 해적들의 만남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었을 개연성이 짙다.
로마 시대에 지중해는 통상로에 더해 통신망 구실을 겸했다. 금붙이를 비롯해 노예주들로부터 빼앗은 각종 귀중품을 잔뜩 소지한 노예들이 시칠리아를 향해 무리를 이뤄 느릿느릿 이동 중이라는 따끈따끈한 뉴스는 지중해 곳곳에서 활개를 치고 있는 해적들의 귀에도 당연히 들어갔을 테고, 해적들로서는 큰 장이 섰는데 굳이 오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해적들은 반란을 일으킨 노예들이 힘이 없으면 약탈을 시작하고, 힘이 있으면 거래를 시도할 요량으로 메시나 해협에 미리 닻을 내리고 있었으리라. 스파르타쿠스의 비범하고 강인한 카리스마적 면모를 발견한 해적들은 내심 바라던 노략질 대신 흥정에 나섰으리라. 해적들은 일종의 사은행사 차원에서 반란군 2천 명을 시칠리아 섬으로 염가에 운송해줬다. 해적선에 탑승해 시칠리아로 건너간 반군 병사들은 때마침 그곳에서 활활 타오르던 노예들의 반란, 또는 해방투쟁에 기름을 끼얹었다.
밀당의 연속이었을 검투사와 해적의 기괴한 협상은 초대형 사기사건으로 막을 내렸다. 해적들이 돈만 챙기고서 먹튀를 해버린 탓이었다. 노예들로부터 사취한 대량의 금은보화를 배에 가득 싣고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파렴치한 해적들을 바라보며 스파르타쿠스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의 뒤통수에다 대고 종주먹을 움켜쥐고서 욕설을 퍼붓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곰곰이 따져보면 스파르타쿠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알프스 산맥 방면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에서 그는 울며 겨자 먹기로 해적들과 비즈니스를 해야만 했고, 근육질 검투사와 노회한 해적 간의 상거래가 전자는 쪽박을 차고 후자는 대박을 터트리는 희대의 먹튀극으로 귀결되는 건 명백한 시간문제였다.
설령 거래가 실제로 성사되어 스파르타쿠스기 인솔한 집단이 운 좋게 배를 탔다면 이야기가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됐을까? 이 또한 미지수이다. 비록 혼란에 빠졌을지언정 로마의 해군력은 여전히 막강했다. 게다가 해적들이 노예들을 계약서에 명시된 대로 최선을 다해 목적지에 도착시켜준다는 보장도 없었다. 따라서 나중에 “고대의 보트 피플(Boat People)”로 불렸을지도 모를 스파르타쿠스의 무리는, 21세기에 들어와 지중해 반대편의 부유하고 풍요로운 유럽 대륙으로 가려던 무수한 아프리카와 중동 출신 난민들이 바다에서 맞이한 비극적 운명을 피해가지 못했을 가능성이 현실적으로 크다.
돈만 떼인 셈이 돼버린 스파르타쿠스는 장화처럼 생긴 이탈리아 반도의 뾰족한 구두코 부분에 해당하는 레기온 반도에 일단은 둥지를 틀었다. 그러자 크라수스는 로마 최고의 건설업자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레기온 반도와 나머지 지역 사이를 가로지르는 길이 54km의 도랑을 판 것이다. 그는 폭과 깊이 모두가 4.5m에 달하는 이 기나긴 웅덩이 위에 높다란 장벽을 쌓았다.
스파르타쿠스는 이 방벽을 당장은 ‘크라수스 산성’이라고 조롱했다. 그러나 겨울이 되어 날씨가 추워지고, 수중의 식량이 바닥나면서 그는 크라수스의 기상천외한 토목공사를 마냥 비웃을 처지가 더 이상 되지 못했다. 이대로 있다간 무리 전체가 추위와 굶주림으로 몰살당할 터였다. 스파르타쿠스는 도랑의 일부를 흙과 나무로 기습적으로 메우고선 병력의 3분의 1을 방벽 너머에 위치한 로마군 장악 지역으로 전격적으로 돌격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