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라수스는 아리암네스의 교묘한 꼬임에 넘어가 군대를 황량한 모래언덕이 끝없이 계속되는 건조한 사막지대로 대책 없이 이끌고 말았다. 로마군 병사들은 적병을 어떻게 물리칠까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다. 당장의 마실 물을 찾는 일에 온 신경을 곤두세워야만 했던 탓이다.
크라수스에게는 마지막으로 말머리를 돌릴 기회가 있었다. 아르타바스데스가 아르메니아로 쳐들어온 피로데스를 먼저 물리치는 게 상책이라고 전령을 보내 알려왔기 때문이다. 군사적 관점에서 판단하면 크라수스에게는 아르메니아 임금과 힘을 합쳐 파르티아 국왕을 치는 쪽이 훨씬 더 현명한 선택이었다. 아르메니아의 지형이 파르티아의 기병대에 불리했을 뿐더러, 그곳에서는 식수 조달과 식량 보급 문제를 더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결정적으로 아르메니아는 로마의 홈그라운드와 마찬가지였다. 시작부터 절반은 먹고 들어갈 수 있는 싸움이었다.
크라수스는 사업가에서 정치가로 변신한 이후로 쓸데없이 자존심만 세졌다. 고집 또한 늘었다. 그가 아르타바스데스가 동맹국인 로마를 배신했다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아르메니아와의 합동작전을 거절한 이유의 5할은 자존심 때문이었다. 나머지 5할은 고집 때문이었다. 아리암네스가 심지어 정식으로 작별인사까지 하고서 로마군 진영을 유유히 벗어나는 순간까지도 크라수스는 교활한 아랍인 족장의 흉계를 전연 눈치 채지 못했다. 크라수스는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 데서 실패가 시작된다는 사실을 제대로 증명해놓은 격이었다.
크라수스는 아리암네스가 사라진 다음에야 로마군이 적군이 파놓은 치명적 함정에 빠졌음을 깨달았다. 그가 적정을 파악하려는 목적에서 파견한 수색대는 일부만 무사히 돌아올 수가 있었다. 얼굴이 사색이 되어 본진으로 귀환한 정찰병들은 파르티아가 병력에서도, 사기에서도 로마군을 압도한다고 보고했다. 진중의 모든 장병들이 동요했는데, 가장 크게 놀란 사람은 하필이면 크라수스였다.
크라수스는 그가 알고 있는 병법들을 머릿속에서 모두 쥐어짜 이리저리 대형을 변화시켰다. 그러나 한번 흐려진 총기가 쉽사리 맑아질 수는 없었다. 휘하의 군대가 발릿소스의 냇물에 이르렀을 때 그는 지친 병사들에게 갈증을 축이며 휴식을 취할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성급한 마음에 행군을 재촉했다. 이는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한계에 달한 병사들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어리석은 자충수와도 같은 명령이었다. 기병대장 카시우스의 반대 의견은 이번에도 철저히 묵살당했다. 고위급 장교들 가운데 오직 크라수스의 친아들만이 사령관의 무모한 결정에 찬성했다. 천하의 로마군이 근본 없는 당나라 군대가 된 셈이었다.
수레나는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기에 앞서서 로마군을 두 번 속였다. 첫 번째는 파르티아군의 숫자가 작아 보이도록 속였다. 두 번째는 파르티아제 무기가 형편없어 보이도록 속였다. 그러므로 로마군은 엄청난 숫자의 파르티아 군사들이 번쩍번쩍 빛나는 화려한 갑옷을 입고서 날카롭게 벼려진 무기들을 들고 나타나자 오금이 저릴 수밖에 없었다.
로마군의 가슴을 한층 더 서슬하게 만든 건 음산한 소리를 내는 파르티아군의 북이었다. 이야말로 사면초가의 형세가 따로 없었다. 단 로마군과 초나라군의 차이점이 있다면 후자에게는 초패왕 항우라는 당대 최고의 불세출의 젊은 용장이 앞장서 분투했다는 점이었다. 로마군에는 항우 장사 대신에 늙고 지친 노인인 크라수스가 존재할 뿐이었다.
플루타르코스는 그의 「영웅전」에서 파르티아 기병들이 긴 머리를 이마 위로 모아 묶어 올렸다고 묘사하였다. 그는 이를 스키타이 양식으로 표현했다. 과거, 한국인들이 서양인들을 만나면 으레 미국사람으로 간주했듯, 고대 로마인들은 서역 출신의 이방인들을 무조건 스키타이 민족으로 인식하였다. 긴 머리를 이마 위로 묶는 건 중국을 중심으로 동아시아에서 흔히 유행하는 머리모양이었다. 파르티아는 로마처럼 다민족국가였다. 따라서 기병들은 우리에게는 흔히 ‘중동’으로 알려진 메소포타미아 지역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동쪽 지방으로부터 충원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수아레스는 장창으로 중무장한 기병대를 돌격시키는 것으로 서전을 열었다. 이는 양수겸장의 노림수를 머금은 공격이었다. 기병들이 로마군의 견고한 방어선을 돌파하면 돌파하는 대로 좋았고, 설령 돌파에 실패해도 나쁘지 않았다. 왜냐면 동료병사들끼리 방패를 이어붙이며 방진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로마군은 부득이하게 빽빽한 밀집대형을 형성해야만 했고, 그 덕분에 파르티아 궁수들은 대충 겨냥하고 활을 발사해도 화살이 로마군의 몸 어딘가에 깊숙이 명중하기 마련이었다.
파르티아의 활과 화살은 이제껏 로마군이 구경하거나 사용해본 활과 화살과는 달랐다. 그것은 활의 가운데 부분이 안쪽으로 움푹 들어간 동양식 활로, 화살이 로마군이 착용한 두꺼운 갑옷을 간단히 뚫고 들어오는 강력한 위력을 발휘했다.
현대의 전쟁사가들은 태평양 전쟁 말기에 사이판 제도의 통제권을 둘러싸고 미국 해군과 일본 연합함대 간에 벌어진 항모항공전에서 미군 함재기들이 일본군 비행기들을 일방적으로 격추시킨 사건을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으로 풍자적으로 일컬어왔다. 파르티아 군사들은 크라수스를 따라 낯선 이역으로 종군해온 로마군 병사들을 마치 날지 못하는 무력한 칠면조를 쏴죽이듯이 먼 거리에서 느긋하게 활을 쏘면서 하나씩, 하나씩 차례로 학살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