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라수스의 구구절절한 연설은 로마군의 떨어진 사기를 북돋지 못했다. 로마 병사들의 풀 죽은 목소리와 달리 파르티아 군사들의 함성소리는 천지를 진동시킬 정도로 우렁찼다.
따라서 싸움은 해보나 마나였다. 측면에 자리한 로마군은 파르티아군 경기병이 쏘아대는 화살비에 거북선 등딱지가 되었으며, 정면에 포진한 로마 장병들은 파르티아 중기병이 내던지는 매서운 창날에 일식집 꼬치구이가 돼버렸다. 파르티아군의 투창이 어찌나 매섭고 묵직한지 앞뒤로 선 두 사람의 몸을 동시에 꿰뚫을 지경이었다.
로마군의 반격이 아니라 밤의 어둠이 파르티아군을 물러가게 했다. 로마군 진영은 성한 자들이 흐느끼는 통곡소리와 다친 자들이 내뱉는 신음소리로 가득 찼다. 크라수스는 비참하게 목이 잘린 아들을 생각하며 입술을 꽉 깨물고 속으로 울었다. 일부 병사들은 야음을 틈타 탈주하는 방도를 고민하기도 했지만 낯선 황무지에서는 파르티아군의 희생양이 되기 전에 사나운 들짐승의 먹잇감이 될 것이 빤한지라 감히 도망갈 엄두를 쉽사리 내지 못했다.
병사들은 크라수스를 원망하면서도 그로부터 위안을 구하기를 바랐다. 그렇지만 크라수스는 홀로 군막에 누워 분노와 절망에 휩싸여 불면의 밤을 지새우는 중이었다. 크라수스는 본래 모든 것을 가진 자였다. 그에게 굳이 부족한 뭔가를 찾자면 폼페이우스의 명성과 카이사르의 인기뿐이었다. 자신에게는 결코 허락되지 않을 것을 기어이 차지하려던 탐욕이 그를 파멸시키고 있었다.
옥타비우스와 카시우스는 마지막 도박을 감행했다. 몇몇 백인대장을 비롯한 휘하의 부하들을 거느리고 탈출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두 지휘관은 총사령관에게 진영을 몰래 함께 빠져나가자고 권유했고, 크라수스는 침묵으로 마지못한 응낙의 뜻을 표시했다.
탈출 과정은 당연히 순조롭지 않았다. 수많은 부상자들을 데리고 가느라 속도가 느려터질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행동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3백 명의 기병들이 자정 무렵에 카르라이에 선발대로 도착할 수가 있었다. 일행의 인솔자인 이그나티우스는 카르라이의 방어를 책임진 코포니우스에게 크라수스가 처한 상황을 설명하고는 보다 안전한 장소인 제우그마로 부하들과 같이 방향을 틀었다. 이그나티우스와 그를 따른 300명의 기병은 자기의 목숨을 구하고자 상관과 동료들을 내버린 비겁한 배신자란 오명이 역사에 오래오래 남게 되었다. 코포니우스의 마중을 받으며 카르라이로 들어온 크라수스는 간신히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파르티아군은 동이 트자마자 격렬한 공세를 재개했다. 그들은 미처 대피하지 못한 4천 명의 로마군을 남김없이 살해했다. 또 다른 곳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2천 명의 로마 병사들 또한 파르티아군의 맹공을 받아 겨우 20인만이 살아남았다. 스무 명이라도 목숨을 부지한 기적은 적군의 용기와 분전에 감탄한 파르티아군이 순전히 관용을 베풀어준 덕택이었다.
수레나는 크라수스를 로마로 고이 돌려보낼 의사가 전혀 없었다. 그는 로마군 지휘부가 간밤에 사라졌다는 보고를 받는 즉시 적군의 소재지를 파악하는 일에 착수했다. 파르티아군의 대장은 크라수스 일행이 카르나이에 은신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는 로마의 집정관과 면식이 있는 아랍인들을 그곳으로 급파했다. 수레나가 내린 특명 아래 카르나이에 당도한 아랍인들은 성벽에 서 있는 카시우스의 모습을 발견하고선 파르티아 측이 협상을 통해 전쟁을 끝내고 싶어 한다는 제안을 해왔다고 둘러대며 로마인들의 발목을 붙잡았다.
카시우스는 파르티아의 협상 제안을 수락하겠다는 답변을 크라수스를 대리해 아랍인들에게 전했다. 카시우스는 영민한 인물이었다. 필자는 그가 파르티아의 음흉한 계략에 어리석게 말려들었다기보다는, 좀 더 많은 병사들이 탈출할 시간을 벌려고 제안을 수락하는 척했다고 생각한다.
카시우스의 잔꾀는 먹혀들지 못했다. 파르티아군이 너무나 빨리 카르라이의 성벽 밑으로 들이닥친 탓이었다. 파르티아는 크라수스와 카시우스가 스스로 족쇄를 차고서 성 밖으로 나와 항복할 것을 요구했고, 로마인들은 포위망이 촘촘하게 완성되기 전에 카르라이로부터 빠져나갈 준비를 서둘렀다.
이번에도 역시나 크라수스의 칠칠치 못한 가벼운 입놀림이 화근으로 구실했다. 그가 안드로마코스에게 로마군의 탈출 계획을 일러준 것도 모자라 아예 길안내마저 부탁했기 때문이다. 안드로마코스는 이름에서 짐작되듯 그리스 또는 마케도니아 혈통의 사내였다.
특히 마케도니아는 불세출의 영웅인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배출한 자존심 센 나라였다. 비록 전쟁에서 패배해 로마의 속주 신세로 영락했을지언정, 마음속으로는 로마와의 항쟁을 이어가고 있었다. 크라수스는 파르티아군이 교전을 기피하는 밤 시간을 이용해 탈출에 나섰고, 향도 역할을 위임받은 안드로마코스는 로마군이 수레나의 추격권 바깥으로 벗어나지 못하도록 일부러 빙 돌아가는 길을 골랐다. 그는 심지어 통과하는 데에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질척질척한 늪지대로 아무것도 모르는 이 불운한 로마인들을 이끌기조차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