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기를 벗어나 청년기에 갓 들어선 알키비아데스는 옳은 소리도 싸가지 없이 한다는 부분에서 참여정부의 황태자로 군림했던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을 연상시켰다. 그는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새롭게 편집할 능력이 있다고 자랑하는 한 교사에게 다음과 같은 독설을 날렸다.
“호메로스의 작품을 업그레이드시킬 재주가 있는 분께서 왜 겨우 애들 상대로 훈장질이나 하고 계십니까?”
알키비아데스의 무자비한 말폭탄은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고 터지기 일쑤였다. 알키비아데스가 어느 날 페리클레스를 만나러 갔는데, 그의 유명한 친척이 아테네 시민들에게 자신의 입장을 해명할 방법을 고민하느라 방문객과 면담할 시간이 없다는 실망스러운 대답이 하인을 통해 돌아왔다. 그러자 알키비아데스는 페리클레스가 너무나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끌끌 차며 이렇게 빈정거렸다.
“나 같으면 시민들에게 내 입장을 해명하지 않아도 되는 방법을 연구했을 거라고 삼촌께 전해주시게.”
고대 그리스 세계는 크고 작은 전쟁의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신체건강한 자유인 남성들은 아주 어리거나 완전히 늙어버린 경우를 제외하면 수시로 전장으로 출동해야만 했다.
소년병 시절의 알키비아데스가 포티다이아 원정에 참전했다가 부상을 입고 땅바닥에 쓰러지자 그의 목숨을 지켜준 사람은 중장보병대의 일원으로 종군한 소크라테스였다. 소크라테스는 새내기 병사인 알키비아데스가 적의 대군에 맞서서 얼마나 용맹하게 분투했는지를 직접 증언해줌으로써 그의 애제자가 무공훈장까지 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나중에 기병으로 복무하게 된 알키비아데스는 델리온 전투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소크라테스를 적군의 칼날로부터 보호해줌으로써 생명의 은인의 은혜에 보답하였다.
알키비아데스가 히파레테와 결혼에 이르는 과정은 선데이서울에나 나왔을 법한 엽기 그 자체였다. 히포레테의 아버지 히포니코스는 아테네의 저명 인사였다. 그는 재력에서도, 권세에서도 남들에게 전연 꿀릴 게 없었다. 알키비아데스는 그런 히포니코스의 얼굴을 순전히 재미로 때렸고, 황당한 폭행사건의 소식이 곧바로 도시 전체로 퍼진 탓에 이 당돌하고 발칙한 젊은이는 사회적으로 매장당할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다.
무례함에서는 남부럽지 않게 살아온 알키비아데스조차 이번 사건의 파장이 적잖이 걱정이 되었는지 이튿날 아침 일찍 피해자의 집을 방문해 입고 있던 갑옷을 벗은 다음 히포니코스에게 분이 풀릴 때까지 자기 등을 채찍으로 실컷 때려달라고 애걸복걸하다시피 간청했다.
히포니코스도 보통 사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는 이 순간이야말로 아테네 최고의 전도유망한 청년을 사위로 삼을 수 있는 천재일우의 호기라고 판단하고는 가해자를 일단은 무조건 용서했다. 그리고 딸인 히포레테를 알키비아데스에 몇 년 후 시집 보냈던 것이다. 코가 꿰인 알키비아데스로서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일설에는 히파레테의 오빠이자 히포니코스의 아들인 칼리아스가 여동생과 알키비아데스의 여동생의 혼인을 중매했다고도 하는데, 칼리아스가 매제에게 전 재산을 뺏길 게 두려워 그가 만약 자식 없이 죽으면 유산 전체를 사회에 환원하도록 유언을 남긴 사실을 고려하면 알키비아스와 히파레테의 결혼이 성사되는 데에는 아무래도 장인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히파레테는 완벽한 아내였다. 문제는 알키비아데스가 남자들끼리의 사회생활에 필요하다는 구실로 화류계 여성들과의 끈끈하고 부적절한 관계를 유부남이 된 이후에도 고집스럽게 유지해갔다는 점이었다. 히파레테는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라 친정으로 돌아갔다. 그럼에도 남편의 방탕한 사생활은 계속되었다. 그녀는 더 이상의 결혼생활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고는 이혼소송을 제기했다.
아테네의 가족법에는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한 여성이 법정에 직접 출두해 결혼에 종지부를 찍기로 결심한 사유를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진술하도록 명문화돼 있었다. 알키비아데스는 재판이 열리는 날, 법정에 때맞춰 나타나 아내를 어깨 위에 들쳐 메고는 유유히 집으로 향했다. 이혼을 원하는 아내를 법정에서 당당하게 보쌈을 하는 행동은 아테네에서는 일종의 관습법이었다. 히파레테는 이후로는 이혼을 요구하지 않았지만 마음고생은 여전했는지 남편이 에페소스로 여행을 간 사이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무슨 핑계와 변명을 둘러대건 아내에 관한 일에서라면 알키비아데스는 아무리 욕을 먹어도 싼 그야말로 나쁜 남자였다.
나쁜 남자로서의 알키비아데스의 면모는 말 못하는 동물을 대할 때에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그는 적잖은 돈을 주고서 시장에서 사온 개의 꼬리를 뎅강 잘라냈다. 사람들이 그를 무슨 짓이든 저지를 수 있는 위험한 인간이라며 두려워하도록 만들려는 목적에서였다. 멀쩡한 개꼬리를 자른 일은 한마디로 쓸데없는 짓이었다. 장인 될 사람을 폭행해 아내를 얻게 된 희대의 엽기적인 사건이 발생한 것을 계기로 알키비아데스가 무슨 짓이든 저지를 인간이라는 인식은 아테네 사회에서 이미 불문율 비슷하게 확고히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온갖 기행과 악행의 주인공인 알키비아데스였지만 그는 엄숙한 분위기에서 공적인 자리에 서기를 바랐다. 때마침 기부금을 모으는 민회가 열렸다. 그는 바로 지금이 시민들에게 선량하고 인정 많은 본인의 진면목을 과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계산하고서 기부금을 내기 위해 연단으로 나아갔다. 기부를 마치고 단상에서 내려오려는 찰나, 그가 옷 속에 품고 있던 메추라기가 갑자기 날아올랐다. 아마도 알키비아데스의 저녁밥상에 올라갈 용도의 날짐승이었던 듯싶다.
신성한 민회 현장에 메추라기가 느닷없이 출현하는 기이한 광경이 빚어지자 어떤 사람들은 “메추라기가 왜 거기서 나와?”라며 손뼉을 치면서 박장대소했고, 어떤 사람들은 도망가려는 메추라기를 잡으려고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이때 메추라기를 잽싸게 잡아서 미래의 주군의 체면을 약간이나마 살려준 안티오코스를 알키비아데스는 측근으로 각별히 중용하게 된다.
데뷔 무대에서 스타일이 구겨질 대로 구겨지기는 했으나 알키비아데스의 공직경력이 앞으로 탄탄대로를 달리리라는 데에는 그 누구도 토를 달지 않았다. 신분, 재력, 그리고 결정적으로 개인 역량의 모든 측면에서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 발군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서양의 고대 민주주의는 인간의 피와 더불어 사람의 말(言)을 먹고 자랐다. 그러므로 위대한 정치가의 반열에 등극하려면 빼어난 연설 솜씨를 갖춰야만 했다. 아테네의 역사를 통틀어 단연 최고의 연설가는 데모스테네스(BC 385~322)였다. 데모스테네스는 알키비아데스의 입이 그 머리를 따라가지 못했다고 평가하였다. 상황파악은 재빨랐으나, 상황에 적합한 어휘와 표현을 찾아내는 데는 비교적 긴 시간이 걸렸던 알키비아데스의 특성을 고려한 촌평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정치인 알키비아데스는 행동은 적극적이되, 말은 신중한 인물로 분류되었다.
흥미롭고 역설적인 대목은 테모스테네스는 실력이 언변을 뒷받침하지 못한 경우였다는 것이다. 그의 영도를 받은 아테네가 신흥 강국 마케도니아와의 싸움에서 말로 이뤄진 메시지 전쟁에서는 이겼지만, 실제 무기로 치러진 진짜 전쟁에서는 완패하고 만 까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