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라수스가 전개한 고사(枯死) 작전은 스파르타쿠스의 진중에 커다란 혼란과 동요를 불러왔다. 반군의 일부는 본대에서 무단으로 이탈하여 이탈리아 남부에 위치한 루카니아 지방의 호숫가에 진을 쳤다가 로마군의 기습을 받았다. 이들은 스파르타쿠스가 신속히 구원의 손길을 뻗쳐준 덕분에 전멸의 참사만은 가까스로 면할 수가 있었다.
크라수스는 트라키아에 머물고 있는 루쿨루스의 부대와 이베리아에 주둔한 폼페이우스의 군대를 지원군으로 파견해 달라고 원로원에 다급히 호소한 후에 전선으로 출발한 터였다. 그는 반군을 상대로 서전에서 의외로 손쉬운 승리를 거두자 원병을 요청한 사실을 뒤늦게 후회했다. 승리의 공적을 혼자 독식하기가 불가능해진 탓이었다.
조바심으로 몸이 달아오른 크라수스는 진압에 속도를 내어 가이우스 카니키우스와 카스투스가 이끄는 1만 2천 3백 명의 반란군을 격전 끝에 몰살시켰다. 탈출한 전직 검투사로 추정되는 두 장수 밑에서 노예 출신의 반란군 병사들은 격렬히 저항했다. 전사자 가운데 단 2명만이 도망치다가 등에 칼을 맞았을 뿐, 나머지 모두는 최후까지 대오를 지키다 전원이 옥쇄했다.
스파르타쿠스는 휘하의 군대가 숫자는 많았으나 전투기술에서는 로마의 노련한 최정예 군단병들에게 도저히 적수가 되지 못함을 이미 일찍이 간파하였다. 그는 페텔리아 지역의 산맥으로 숨어들어 장기전을 꾀했다. 스파르타쿠스가 채택한 전법인 험난한 지형에 의지해 벌이는 유격전은 그로부터 2천 년 후 홍군의 지도자인 중국의 모택동도 구사하게 될 약자들에게 적합한 효과적 전략전술이었다. 스파르타쿠스의 노림수에 말려든 로마군은 막대한 인명 피해를 겪고서 병력을 뒤로 물러야만 했고, 부대를 인솔한 재무관 스크로파스는 중상을 입었다.
스파르타쿠스의 승리는 독이 든 축배로 판명되었다. 부하들이 스파르타쿠스가 구상한 장기전 방침에 반기를 들었던 연유에서었다. 스파르타쿠스와 모택동을 비교하면 군인으로서의 능력은 전자가 압도적으로 뛰어났다. 반면에 정치인으로의 역량은 후자가 단연 우월했다. 스파르타쿠스는 싸움터에서 적을 힘으로 물리칠 재주는 있었지만, 의견을 달리하는 동지들을 말로 설득할 능력은 부족했다.
모택동은 이와 대조적이었다. 그는 국민당과의 전투에서는 허다하게 패배했어도 공산당 내부에서의 노선갈등과 권력투쟁에서는 언제나 승리했다. 지도자에게 정치적 결단력과 리더십이 있고 없음의 차이가 모택동의 공산당은 대장정에 과감히 나서게 만들고, 스파르타쿠스의 무리는 알프스 산맥을 넘지 못하게 막았다.
반란군이 정면대결을 걸어왔다는 소식에 크라수스는 당연히 쾌재를 불렀다. 그는 폼페이우스가 전장에 도착하기 전에 싸움을 끝내고 싶었다. 그러자면 스파르타쿠스의 협조 아닌 협조가 필수적이었다. 그런데 노예들이 제 발로 산중에서 걸어 나와 싸움을 건다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있을 수가 없었다.
전투는 반란군 전사들이 참호를 구축하던 로마군 병사들을 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양측 모두 전투가 개시된 참호 쪽으로 병력을 계속 축차적으로 투입했고, 싸움의 양상은 전군이 격돌하는 결전으로 이내 귀착되었다.
스파르타쿠스의 마지막은 장렬했다. 그는 출전에 앞서서 말의 목을 베었다. 이기면 로마군 군마를 빼앗아 타면 되고, 지면 더 이상 말 따위의 가축은 필요 없을 것이란 생각이었다. 그는 싸움터 한복판으로 용감하게 뛰어들어 적군의 총수인 크라수스를 향해 무시무시한 기세로 맹수처럼 돌진했다. 스파르타쿠스는 곧 수많은 적병에게 에워 쌓였다.
그는 죽기 전에 두 명의 백인대장을 포함한 무수한 로마군을 쓰러뜨렸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 또한 쓰러졌다. 스파르타쿠스는 로마군에게 산 채로 사로잡혀 십자가형에 처해지는 모습으로 묘사된 영화에서와는 달리, 결코 살아서는 적에게 무릎을 꿇지 않았다. 고대 서양세계를 뒤흔든 노예들의 대반란은 스파르타쿠스의 죽음과 더불어 비장하게 막을 내렸다.
폼페이우스는 전선에서 스파르타쿠스와 맞설 기회가 없었다. 그가 맞닥뜨린 대상은 끊이지 않는 패잔병의 무리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폼페이우스는 말미에 숟가락만 잽싸게 꽂았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는 전투를 이긴 사람은 크라수스이지만, 전쟁에서 승리한 주인공은 폼페이우스라고 표현하는 뻔뻔하고 노골적인 자가발전을 서슴지 않음으로써 정치적 라이벌의 염장을 제대로 질렀다. 폼페이우스는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노예들의 봉기를 진압한 업적에다가 이베리아에서 발생했던 세르토리우스의 반란을 토벌한 공로까지 더해진 까닭에 수도인 로마 시내에서 거창하고 위풍당당한 개선행진을 펼치는 영광을 만끽할 수가 있었다. 크라수스 입장에서는 죽 쒀서 뭐 준 꼴이었다.
크라수스가 전쟁을 벌인 곳은 본질적으로 로마 본토인 이탈리아 반도 안이었다. 그가 굴복시킨 자들은 원래부터 로마의 노예들로 생활하던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크라수스는 위대한 정복자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인 화려한 개선행진을 본인도 폼페이우스처럼 해야만 한다고 차마 마냥 고집을 부리기가 힘들었다. 로마 사회의 불평등 심화에 누구 못지않게 톡톡히 기여해온 크라수스는 “세상 참 불공평하네…”라고 속으로 씁쓸하게 툴툴거리며, 더 늦기 전에 정복자의 월계관을 자기도 반드시 쓰고야 말겠다고 결의를 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