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남투데이=서진솔 기자] “철거 안 하는 게 좋아. 딴 데로 이사 가면 혼자야. 누구하고 얘기할 사람도 없고"
영등포 쪽방촌에서 20년 넘게 거주한 김영춘(남·75세)씨의 방은 한 평 남짓으로, 성인이 누워 발을 뻗으면 꽉 찬다. 화장실도 없다. 공공 화장실을 사용하기 위해선 한겨울에도 한참 걸어 나가야 한다. 그럼에도 그는 이 방을 벗어나는 것이 두렵다.
21일 김 씨의 제의로 들어간 그의 방은 '쪽방' 하면 으레 갖기 마련인 이미지와 달리 깔끔했다. 좁은 공간에 냉장고, TV, 전기밥솥이 한쪽에 차례로 놓여있었고 이불과 기타 잡동사니가 다른 한 쪽에 차곡차곡 정리돼있었다.
벽엔 집주인이 설치해줬다는 선반이 박스를 받치고 있었으며 속옷, 수건, 외투 등이 옷걸이에 가지런히 걸려있었다. 에어컨이 설치돼있었고 벽지 위엔 두꺼운 단열재가 발라져있었다. 새것처럼 깨끗한 에어컨과 단열재가 어디서 났느냐고 묻자 김 씨는 "(단열재를) 내가 직접 사서 붙인 거지 누가 해주겠어. 에어컨도 (재작년에) 너무 더워서 내가 산 거야. 술 안 먹고 (그 돈으로) 산 거지"라고 말했다.
그는 "하루 일과랄 게 뭐 있어. 그냥 밖에 나갔다가 (안팎을) 왔다갔다 하는 거지"라며 평소 일상을 전했다.
영등포역 왼편, ‘청소년 통행금지 구역’으로 들어가면
영등포역은 서울 대표 번화가 중 한 곳이다. 타임스퀘어를 비롯해 신세계, 롯데 백화점이 즐비해 있다. 그러나 역 주변에는 음산한 분위기가 맴돈다. 다른 곳에 비해 노숙인도 많다. ‘쪽방촌’이 있기 때문이다.
역을 나와 왼쪽으로, 롯데 백화점 주차장과 파출소를 지나면 ‘24시간 청소년 통행 금지’를 알리는 표지판이 나온다. 표지판은 경고를 되새기듯 세 번 연달아 방문객을 맞이한다.
쪽방촌으로 들어가는 좁은 길에는 삼삼오오 모여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누추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오전부터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때론 큰 소리를 낸다. 그들은 통행 금지 표지판과 함께 방문객이 대도시 서울 속 또 다른 세상에 들어왔음을 알려준다.
”화장실이 없는 게 가장 힘들어“
쪽방촌은 좁고 긴 골목을 따라 양쪽으로 작은 집들이 따닥따닥 붙어있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집들은 대부분 임시 건물이다. 임시 건물이 아닌 집들의 지붕은 판자로 대충 기워져 있으며, 벽은 오래돼 색이 바래고 금이 간 경우가 많았다. 전선은 얼기설기 엉켜있어 합선 등 화재 사고 위험이 커 보였다.
이 지역에서 15년 거주했다는 장순자(여·64) 씨는 ”여기 사는 사람들은 다 수급자에요. 집 크기도 다 비슷하고 월세도 다 20만원이야. 조금 큰 집이야 (월세를) 좀 더 내겠지만. 갈 데 없어서 온 사람들이지“라며 쪽방촌을 소개했다.
주민들이 겪는 고통은 예상과는 달리 추위나 더위가 아니었다. 장 씨는 ”(지자체에서) 연탄을 주니까 괜찮은데 제일 불편한 건 화장실이랑 목욕탕이 없는 거에요. 추워도 더워도 (화장실을 이용하려면) 한참 나가서 사용 해야 해“라고 토로했다.
쪽방촌에서는 사건 사고도 자주 일어난다. 지난 16일에는 아내와 이혼 후 쪽방촌에서 5년 정도 살았던 이정웅(남·74)씨가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이에 대해 장씨는 ”(밥 안 먹고) 매일 같이 술만 먹다가 죽기도 하고 방에서 아무도 모르게 혼자 죽기도 하고, 싸우다가 죽기도 하고, 사고 많이나. 그래서 밤에는 문 잠그고 방에 있지“라고 전했다.
옆에서 유심히 듣던 김영춘 씨도 ”밤에도 술 먹고 시끄럽게 하고... 그러려니 하지 뭐. (파출소가) 바로 옆에 있어도 경찰들은 신경도 안 쓰는 걸“이라며 무심히 말을 더했다.
개발 사업추진 예고만 수차례, 기대와 회의 공존해
장순자씨와 쪽방촌에서 십 년 넘게 친구로 지낸 박춘숙(여·66)씨가 “(개발) 공사 들어가면 그동안 어디서 지내야 할지가 문제에요”라고 말하자, 장 씨는 “다 (정부가 임시 거주 공간) 만들어서 해준다고 했잖아!” 버럭 언성을 높인다. 박 씨는 장 씨가 하는 말에 꼼짝도 못한다.
국토부의 계획안은 쪽방촌 주민들에게 4.84평의 공공주택을 보증금 161만원, 월세 3만원에 제공한다는 내용이다. 과거 이미 수 차례 정부와 지자체 주도로 영등포 쪽방촌 재개발 사업이 있었고 주민들 대상으로 설명회까지 진행했지만 모두 무산됐다. 이에 대해 주민들의 기대와 회의가 공존했다.
주민들은 국토부 발표가 있었던 20일, 기자들이 찾아와 알려준 덕분에 쪽방촌 개발계획 내용을 알게 됐다고 전했다. 장 씨는 “(월세가) 3만원이면 좋지. 지금은 거의 다 20만원 씩 내요. 돈보다 집 주는 게 좋아. 집도 없고 돈도 없는데 (정부에서) 시키는 대로 해야지. 빚이라도 내서 들어가야지”라고 말했다.
반면 김영춘씨는 ”2000년대부터 철거 한다 그랬어. 세 번이나 개발계획서 날라 오고 주민 센터에 철거 설명회도 참석했어. 하다 말고, 하다 말고... 하지도 않을 거 기대도 안 해. 서울시 무슨 위원회에서 통과됐다면서 마지막으로 (개발한다고) 한 지가 5년 됐어”라고 전했다.
영등포역 인근에서 부동산을 운영하는 공인 중개사 김모 씨는 이번 ‘영등포 쪽방촌 개발’ 사업이 성사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그는 “2018년부터 집값이 오르기 시작하고 작년에는 수 년간 해결되지 않던 인근 노점상 철거 문제도 해결됐다”며 “(과거에) 이렇게 구체적인 방안이 나온 적이 없어 (이번에는 성사될) 가능성이 꽤 높아보인다”고 설명했다.
한강의 기적 성과물, 그리고 여전한 흉터
영등포 쪽방촌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쪽방촌 판잣집과 타임스퀘어가 겹쳐 한 눈에 보인다. 이른바 ‘한강의 기적’의 성과물과 그에 따른 흉터가 서로 마주 보고 있는 셈이다.
수 십 년 동안 쪽방촌은 우리 사회가 숨겨온 일종의 ‘흉터’였다. 최근 영화 ‘기생충’, ‘조커’ 등 문화 작품과 프랑스, 칠레 등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정부 시위가 이같은 ‘흉터’를 드러내고 있다. 이번 쪽방촌 개발 사업이 흉터를 치유하고 우리 사회가 쪽방촌 주민들을 포용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까.
김영춘 씨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철거 안 하는 게 좋아. 없는 사람들끼리 오래 (같이) 있어서 서로 얼굴을 알잖아. 딴 데로 이사 가면 얘기할 사람도 없고, 수준 안 맞아서 같이 못 살아”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