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말이기는 하나 20세기, 초년병 기자시절 때 나는 사조산업 계열신문사에서 해운항만청을 '커버'하는 ‘수산부’말단 기자였다.
그런데 동원수산 소속 참치 잡이 원양어선이 칠레 앞 바다인지, 아르헨티나 앞 바다인지에서 침몰했다.
선원 가족들은 지금으로 치면 ‘비대위’이겠으나, 그 때는 그저 가족들이 사태파악을 위해 동원참치 본사 앞에 모였고, 본사가 ‘쌩까자’ 지방에서 오신 분들(선원들 대부분이 부산 출신)이 대부분이라 근처 여관에서 모이셨는데, 여관 앞마당이 그들의 집회장이 되었다.
그 먼 바다에서 국위 선양까지 하던 원양어선의 사고는 중앙지 사회면에 대서특필됐고, 그 때로서는 일반인에게는 이해가 어려웠던 생소한 외국인 승선선원이 내국인 보다 5배는 많았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선상반란으로까지 추측이 번졌다.
그 이틀째 즈음에 가족들이 대부분 계신 그곳이 어딘지 나름 첩보로 알게 되었다.
그래도 격일로 발행하는 일간지로서의 우리는 신속해야했으나, 조심스러웠다.
아무튼 사조산업 계열 언론사인데, 언론을 가지지 않은 경쟁사 동원산업의 최대 위기에 접근하기에는 모기업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독자에게는 물론, 그전에 취재원에게도 살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반신반의, 데스크에게 이들이 모여서 농성을 한다는데, 가보겠다고 했더니, 고심하던 데스크는 그래 가보기는 해봐, 하지만 니 신분이 사조계열이라는 게 알려질 것 같으면, 취재 안 해도 좋으니, 바로 물러서, 오해사면 공정성을 잃어, 맞을지도 모르고...네
나는 사조 계열 언론사 기자가 아니라, 다만 언론인이라는 자부심과 경각심을 되새기며 늦은 밤 현장에 갔다.
기껐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기자는커녕 누구인지도 모르게 변방만 겉돌다 겨우 들은 먼 얘기, 대자보 문구 정도가 전부였다.
아무튼 기사는 썼다. 야마도 없고, 결론도 없고, 동네 쌈 구경 하고 온 듯한 기사.
아무튼 데스크는 OK했나 보다. 그때는 담당 기자도 신문이 나와 봐야 내 기사의 게재여부를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데스크가 해난심판원, 해양연구원 등을 찾아가보라고 한다. 그런 기구가 있었나?
뭐, 가라면 가야지. 그런데, 특히나 해난심판원에서는 해난 사고를 인지하지 못했던 것 같고, 내게 오히려 사건 경위를 질문하는 바람에 너무나 난감했다.
하지만, ‘야마’ 하나 건졌다. 그들은 모른 척 하다가 결국,
“더 확인 해야겠지만, 지금까지 알려진 상황으로만 보면(그들은 내가 그 사건의 위치, 해역, 선박을 어찌 알고 왔지? 하는 표정도 잠시 보였다는...), 이건 ‘자연재해’에 더해진 ‘인재’입니다. 풍랑으로 그 큰 배가 침몰할 정도는 아닙니다”.
당연히 ‘남태평양서 침몰한 동원참치 원양어선, 인재 가능성 커’ 쯤으로 후속기사가 나갔다.
이제부터는 동원 측의 항의가 올까 봐 더 걱정이 됐다.(우리 모기업 사조가 동원 보다 얼마나 약한지, 동원 보다 얼마나 로비력이 딸리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두근, 두근, 하루, 하루.
가족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가제사? 헛제사? 한다고 오라는 거다. 뭔 일이지?(난 그 단어를 몰랐다)
가봤더니 그들도 긴장 풀고, 잔치는 아니지만 재충전하고 있었다. 분향소 앞에서 그들이 웃기도 했다. 각자의 하소연도 그 때, 이자리 저자리 불려 다니면서 들었다.
그 가족들의 사연도 썼다. 그 가족들에게 개인적으로 들은 사연 조차 쓰는게 맞는지 약간은 아리까리 했으나, 나는 기자였고, 이들은 내가 기자인지는 알고 있었다. 아무튼 나는 이들을 위해서라도 할 수있는 거라고는 알리는 거였다. 그뿐이었다.
그런데 그래도 별 소식이 없다. 동원도, 하물며 사조도...
그런데 그러다 연락이 왔다. 농성하던 가족들에게서, 한 번 더 와달라는 거다, 동원 측과 사고해역에 가족들이 가서 분향 꽃이라도 던질 수 있게 해달라고 했는데, 그 협상이 오늘 마지막이라는 거다. 와서 좀 확인, 보증해달라는 거다.
(에이 씨, 미리 말씀 하시지... 술집에 막 앉아, 아직 안주도 안 나왔는데...농담이다. 달려갔다. 함께 마시려던 그 선배도 꼬여서 같이 갔나?)
그때는 그래도 간이 포라로이드 카메라가 있었다. 막 생기기 시작한 편의점에서 3,000원 쯤에 팔던. 그걸 사들고 해당 장소로 택시타고 갔다.
그때 처음 내 신분을 확인한 동원산업 직원들은 별 반감을 표하지 않았고, 오히려 사조 계열사 소속인 내 보증이 공정하겠다고 판단했던 듯하다.
그 가족들, 비용 등의 이유로(그 때는 가장 큰 장애요인이었다...갔다오려면 당시 돈으로 1,000만원이 넘는 남미 앞 바다? 넘사벽이었다) 그렇지만 그 협상으로 대표 7~8분은 가신 것 같다.
사고의 자초지종은 아무도 모른다.
해난 심판원이 내게 한 말, “바다에는 스키드 마크도 없어서 아무도 몰라요”.
그 뒤로 나는 스키드 마크를 알기 위해 사전을 뒤졌다. 그러고 나니, 아하? 하지만, 너무 허무하네, 너무 무성의하네, 였다.(운전자가 브레이크를 잡아서 도로에 남은 차량의 바퀴자국?...없지! 당연히! 바다에...바다의 사고에 우리는 아직도 무책임한 것 같다. 스키드마크가 없어서?) 기껐 이런 해난 심판원이라니...
기자인 나는 오늘도 갈등과 혼란의 현장에 이물질처럼 끼어든다. 맞을까 두렵기도 하지만,,,
기자는 당사자 어느 쪽에나 경계 대상이겠으나, 알지 못하면 적지 못한다. 적었어도 확인 못하면 고쳐야한다.
그러나 알았다손 다 안게 아니라면, 확인 된 것까지만 알려야한다. 하지만, 50:50이라면 약자 편에서 알리겠다.
난 아직 약자 편에 서 있으려고 한다, 반대편의 욕을 먹어도.
입증의 책임은 강자에게 있다. 강자는 내게, 그 약자들에게 너희를 입증 해 보시라.
약자가 의심하면, 강자는 모든 정보를 제시해야 한다. 판단은 모두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