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포로 미테랑은 왜 행운아였나
전쟁사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실제 전투를 치르는 부분과 전쟁을 준비하는 부분이다.
전자가 전장의 장군들과 병사들이 활약하는 역사라면 후자는 후방의 정치인과 국민들이 주인공인 역사이다. 지구상에서 내로라하는 강대국들은 미국과 중국 같은 현재의 군사강국이건, 독일과 일본처럼 과거의 군국주의 제국이건 전쟁을 준비하는 역사를 열심히 연구한다. 왜냐? 특정한 나라가 전쟁을 준비했던 역사를 연구하면 해당 국가의 정치경제적 구조의 본질과 동시대 인민대중의 사회적 심리상태를 거의 정확하게 파악하고 포착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 같은 순수 민간인들에게는 당연히 후자가 관심사가 되는 법이다.
베르사유 조약 체제는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의 짧은 휴지기를 의미하는 전간기(Inter-War)를 규율했던 국제질서였다. 그러나 국제연맹과는 동반자 관계였던 베르사유 체제는 주도국가인 프랑스조차 안정성과 지속가능성을 신뢰하지 않았을 만큼 부실하고 허약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프랑스 정부는 육군성 장관으로 재임하던 앙드레 마지노의 제안을 받아들여 6년에 걸쳐서 장장 750킬로미터 길이에 달하는 대규모 방어시설을 무려 160억 프랑이라는 엄청난 예산을 투입해 독일과의 국경선에 구축한다. 160억 프랑은 지금의 한국화폐로 20조 원의 값어치를 지니는 천문학적 금액이라고 한다. 하지만 1929년 가을의 뉴욕 주식시장 붕괴를 계기로 엄습한 전 세계적인 경제대공황을 고려하면 실질적 체감지수로는 서너 배가 되리라.
이후의 세계사의 전개과정은 우리가 잘 아는 바대로이다. 독일군은 아르덴의 삼림지역으로 우회해 전투시작 6주일 만에 프랑스군의 항복을 받아낸다. 마지노선 안의 편안한 지하벙커에서 푸짐한 식사와 따뜻한 목욕으로 부지런히 몸을 만들며 독일군의 침입에 대비하던 50만 명의 프랑스군들은 변변한 싸움도 못하고서 독일군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나중에 프랑스 최초의 사회주의자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프랑스와 미테랑은 총알이라도 몇 방 쏘고서 포로로 사로잡혔다는 점에서는 그나마 행운아일지도 모른다.
태평양전쟁 시기에 일본 연합함대가 있는 자원, 없는 자원 탈탈 털어서 건조한 거대 전함 야마토와 더불어 프랑스가 나라 전체를 쥐어짜 완성시킨 마지노선은 제2차 세계대전이 이미 오래전에 끝난 오늘날까지도 사가들의 놀림감이 수시로 돼오고 있다. 야마토의 거포가 바다에서의 대표적 무용지물이었다면, 마지노선에 갖춰진 복잡하고 정교한 방어시설은 지상에서 제일가는 무용지물이었던 이유에서다.
계몽과 예술의 나라가 열중한 미개한 삽질
계몽철학이 싹튼 예술의 나라 프랑스는 마지노선이라는 무지몽매한 삽질에 어떤 연유로 그토록 미친 듯 혈안이 되어 목을 맸을까?
사실 2차 세계대전 초반에 전광석화처럼 수행된 독일군의 전격전에서 프랑스군은 최선을 다해 분전했다. 전선의 프랑스군이 귀중한 전차를 유기하고서 걸어서 도망간 중대 원인은 프랑스군의 전차들이 고장률이 높거니와 고치기도 어려웠던 데 있다. 됭케르크 항구 외곽의 방어를 담당한 이름 모를 프랑스 병사들의 눈부신 희생과 선전이 없었다면 서구연합군의 일원인 영국군의 성공적인 철수작전도 불가능했으며, 따라서 「덩케르크」라는 영화가 후세에 제작될 까닭도 없었다. 즉 프랑스의 졸전과 그에 뒤이은 어이없는 패전은 전시에서의 장군과 병사들의 잘못이 아닌 평시에서의 정치인과 인민들의 책임이었다는 뜻이다.
먼저 정치인들의 잘못부터 따져보자. 프랑스의 수많은 정치인들은 1차 세계대전의 쟁쟁한 참전용사들이었다. 뮌헨회담에 영국의 체임벌린 총리와 나란히 서구 열강의 대표 자격으로 참석했던 프랑스의 달라디에 총리 또한 1차 대전의 영웅이었다. 체임벌린과 달라디에는 히틀러의 거친 협박에 굴복하고 중재자 혹은 촉진자를 자처한 무솔리니의 교묘한 궤변에 농락당해 체코슬로바키아를 나치스의 독일 제3제국에 공짜로 팔아넘긴 무능하고 비겁한 유화정책의 원흉들로 지목돼 후세로부터 두고두고 손가락질을 당해오는 중이다.
허나 달라디에에게는 나름의 믿는 구석이 있었다. 진지전에서 가치와 유효성이 입증된 수비 만능주의의 산물인 마지노선이었다. 독일이 또다시 쳐들어온다면 프랑스는 마지노선 안에서 편안하게 지키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면 독일은 머잖아 제 풀에 나가떨어질 것이라고 달라디에를 비롯한 대다수 프랑스 위정자들은 판단한 터였다. 물론 여기에는 결정적 단서가 변수로 자리해 있었다. 패전의 교훈을 곱씹어온 독일군부의 수뇌부가 마지노선 정면으로 무식하게 ‘반자이 돌격’을 감행할 것이라는 희망사항 가득한 전제조건이었다.
다음에는 프랑스 인민의 책임을 추궁하련다. 프랑스 인민은 독일에 대한 공포감에 지레 위축돼 있었다. 공격이 독일의 몫으로 배당되고, 공포는 프랑스의 역할로 낙착된 배경이다. 프랑스 인민들은 독일 민중 역시 자기들과 마찬가지로 전쟁에 대한 극도의 공포와 염증에 시달리고 있음을 몰랐다. 나의 공포와 패배주의는 너의 공격과 승부욕을 자연스럽게 자극해대기 마련이다. 독일의 공격이 있기 이전에 프랑스 인민의 공포와 패배주의가 있었던 셈이다.
보수주의자 드골의 선견지명
독일통일전쟁, 곧 보불전쟁의 산물로 수립된 프랑스 제3공화정은 걸핏하면 내각이 교체되는 정치적 불안정의 대명사로 통했다. 이웃나라 독일의 바이마르 체제 정국상황이 워낙 막장인지라 상대적으로 조명이 덜 되었을 따름이다. 그럼에도 마지노선 공사가 만으로 6년간이나, 그것도 대공황이 전 세계를 혹독히 강타한 와중에 꾸준히 추진될 수 있었던 건 프랑스 유권자들의 압도적인 지지가 이를 뒷받침해준 덕분이었다.
경험의 포로가 된 정치인들과 공포의 포로가 된 인민대중을 위해 싸워야 하는 병사들을 기다리는 운명은 적군의 포로가 되는 비극뿐이었다. 단 6주 만에 독일군에게 백기를 든 프랑스군은 총사령관 웨이강 원수를 위시한 200만 명의 장병이 독일군의 포로가 되는 치욕을 겪는다. 그 무렵 프랑스의 총인구가 3,900만 명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실로 어마어마한 포로 숫자였다.
마지노선에 안주하고 집착한 프랑스에게 그 결과는 너무나 허망하고 참혹했다. 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 전쟁의 포화가 멎은 지 겨우 20여 년 만에 패전국의 위치로 초라하게 급전직하했기 때문이다. 이는 변화된 환경에 자신을 맞추려 하지 않고, 변화된 환경을 자신에 맞추려 한 경직되고 폐쇄적인 사고가 정치인들은 물론이고 일반 민중에게까지 광범위하게 만연한 결과였다. 프로크루스테스는 침대에 지나가는 행인들을 눕혔지만 전간기의 프랑스는 침대에 스스로를 눕혔다. 드골 장군과 일부 소장파 전문가들만이 세상이 변했음을, 숙적 독일이 변화된 세상에 조응해 전략전술과 참모진용을 획기적으로 혁신시켰음을 호소했지만 그야말로 황야에서의 고독한 외침에 불과했다.
프랑스는 신형 전차 생산과 최신형 항공기 개발에 마땅히 들어갔어야만 할 예산과 인력을 마지노선 건설에 대책 없이 쏟아 부었고, 그로 말미암아 프랑스 전차부대는 무전기도 장착되지 않은 눈멀고 귀 막힌 탱크를 끌고서 독일 기갑군단에 맞서야 했다. 비유하자면 프랑스 정보통신기술 회사와 독일 ICT 기업이 글로벌 시장에서 인터넷 플랫폼 서비스 경쟁을 벌이는데, 프랑스 회사는 이제는 낡은 과거의 유물이 돼버린 CD-ROM을 차떼기로 대량 구입하느라 정작 중요한 서버 증설 작업은 치명적으로 소홀히 한 형국이었다. (②편에 계속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