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의 그때 그 돌직구
“기업은 이류, 행정은 삼류, 정치는 사류”
벌써 몇 년째 병상에 누워 있는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이 1995년 봄, 중국 북경에 주재하는 대한민국 특파원들과의 간담회에서 대담하게 발설했던 유명한 이야기이다. 이건희 회장의 이 문제적 발언은 우리 사회의 지식인층과 진보진영으로부터는 재벌 2세의 오만함과 특권의식이 뚝뚝 묻어나는 반민주적이고, 반민중적인 희대의 망언으로 손가락질당하며 오랫동안 규탄을 받아왔다.
얼마 전까지 문재인 정부의 해양수산부 장관으로 재임했던 김영춘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과거에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을 겨냥해 “형은 옳은 말을 참 싸가지 없이 한다”고 직격탄을 날린 바가 있다. 이건희 회장의 북경 발언도 어쩌면 그가 너무나 옳은 말을 지나치게 불쾌한 어조로 표현한 탓으로 말미암아 격렬한 반발과 공분을 샀을지도 모른다.
사실, 한국사회에서 정치가 기업보다 나은 면모와 실적을 보여준 지가 도대체 언제였는지 대부분의 국민이 이제는 기억조차 가물가물할 지경이다. 정당이 문제의 해결사가 아닌 문제의 원인으로 전락한 일이, 정치인들이 사회적 갈등의 중재자가 아니라 갈등의 조장자로 변질된 사태가 너무나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정치에 비하면 그나마 한 단계 위였던 관료사회도 요즘은 정치권과 피장파장 동급이 되었다. 고위 공직자들은 청와대 분위기만을 요리조리 살피면서 정권 수뇌부와 코드 맞추는 게 하는 일의 전부다. 하급직 공무원들은 거대 노조까지 결성해가며 자기들 밥그릇 챙기기에만 열심이다. 관료가 나라와 국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나라와 국민이 관료들의 철밥통과 기득권을 지켜주기 위해 존재하는 형국인 셈이다.
일본의 경제침략, 올 것이 왔다
4류였던 정치는 계속 꿋꿋하게 4류로 남아 있고, 3류였던 행정 즉 공무원들은 4류로 내려앉은 국가가 외침을 당하지 않는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할 노릇이다.
그 이상했던 노릇이 드디어 제대로 정상화됐다. 이런 유형의 비정상의 정상화는 차라리 없는 편이 백배는 나았다. 그러나 내려갈 팀은 내려가듯이, 정상화될 비정상화는 정상화되기 마련이다.
일본은 이른바 명치유신으로 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제국주의 열강의 반열에 진입하였다. 일본의 성공적인 부국강병에는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한 가지 비결이 있었다. 그건 바로 양아치의 생존철학이었다.
건달과 양아치의 구별법은 오래전부터 인구에 회자되어온 흥미로운 주제이다. 필자의 분류법에 의거하자면 강자에 강하고 약자에 약하면 흠결없는 건달이고, 강자에 약하고 약자에 강하면 에누리 없는 양아치이다.
명치유신 이후 일본의 국책은 양아치의 처세술을 철저히 준수해갔다. 일본은 오직 자신들이 이길 것 같은 나라를 상대로만 전쟁을 벌였다. 일본이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결정직 원인은 당대의 세계 최강국 대영제국이 일본을 노골적으로 편들어준 데 있다. 영국이 러시아 발틱 함대를 전 세계 바다 곳곳에서 집요하게 견제하며 그 힘을 빼준 덕분에 도고 헤이하치로의 일본 연합함대는 대한해협에서 지노비 로제스트벤트키 제독의 지친 러시아 함대를 손쉽게 격멸할 수가 있었다.
그렇게 약아빠지게 굴어온 일본이 딱 한 번 진짜 센 나라와 붙은 적이 있었다. 나구모가 지휘하는 항공모함 기동부대의 선전포고 없는 진주만 기습으로 촉발된 태평양 전쟁이다. 이 전쟁에서 일본은 원자폭탄 두 방을 얻어먹고 네티즌들 용어를 빌리자면 그야말로 떡실신을 당하고 말았다. 그때 일본은 중요한 한 가지 교훈을 뼛속 깊이 새기게 된다. 다시는 건달의 길을 걷지 않겠다고, 생긴 대로 양아치로 살겠다고.
한일 청구권이 이렇고, 대법원 징용 판결이 저렇고 같은 기술적이고 구체적 논의들은 필자의 실질적 관심사항이 아니다. 나에게는 그것을 둘러싼 옳고 그름을 반박 불가능하게 판단할 전문성과 노하우도 없다. 단지, 확실한 사실은 국제사회에서는 힘이 논리를 만들지, 논리가 힘을 만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미국이 일본의 진주만 기습을 의도적으로 유도했다는 음모론은 기습작전이 단행된 직후부터 끊임없이 횡행해왔다. 나는 음모론은 영원한 약자들의 최종적 피난처일 뿐이라고 확신한다. 거의 신뢰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을 다룬 미일 합작의 대작 전쟁영화 「토라 토라 토라(Tora Tora Tora)」를 보면 일본이 기습적으로 선제공격을 가하리라는 징후를 미국 정부와 군부가 공공연히 무시하는 장면이 여러 차례 묘사된다. 전투에 실패한 잘못은 용서해도, 경계에 실패한 과오만은 용서할 수 없다고 큰소리쳤던 맥아더조차 정작 본인은 일본의 공격에 대한 경계를 소홀히 했다가 필리핀의 클라크 공군기지에 배치돼 있는 수백 대의 귀중한 항공기들을 개전 초기에 허무하게 상실했었다. 미국이 얼마나 일본을 얕봤는지를 가르쳐주는 대목이다.
일본에 관한 정확한 인식과 정보를 갖기 시작한 이후에야 미국은 일본에게 비로소 연전연승을 거두게 된다. 미군이 미드웨이 해전과 과달카날 섬의 소모전에서 일본군을 압도한 건 상대를 더 이상 깔보지 않고 최선을 다해 싸운 연유에서였다. 자신감이 실력의 일부이지, 실력이 자신감의 일부는 아닌 것이다.
지금은 무기가 아닌 무역으로, 군인이 아닌 기업인으로 싸우는 경제전쟁의 시대다. 따라서 일본의 한국 공격은 당연히 예상대로 경제적 성격을 띠었다. 일본 수상 아베의 한국에 대한 반도체 관련 부품과 소재 수출 규제 발표는 어뢰와 폭탄이, 제로센과 항모가 동원되지 않은 21세기판 진주만 기습이었다.
나는 지금 매우 당혹스럽고 혼란스럽다. 기습적 선제공격은 전력과 자원이 열세인 쪽에서 먼저 감행해야 납득 가능하고 합리적이다. 한데 비유하자면 현재 상황은 루즈벨트가 미국의 태평양 함대를 동원해 먼저 도쿄만의 연합함대를 친 꼴이다. 기습의 충격과 효과가 더욱더 극대화될 수밖에 없는 배경이다.
일각에서는 일식집 가지 말고, 아사히 맥주 사먹지 않고, 우리나라 걸그룹 안의 일본인 멤버 퇴출하는 방식으로 반격에 나서자고 주장한다. 솔직히 갑갑하고 안타깝다. 미국이 수백 대의 B-29 폭격기로 일본 열도를 연일 맹폭한 데 대해 일본 대본영이 풍선에 폭탄 하나 달랑 매달아 태평양 건너 북미 대륙으로 편서풍에 띄워 보낸 희비극이 자꾸만 연상되어서이다.
그래도 일단은 기업이 맞서라
루스벨트 대통령이 일본의 기습을 허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의 확고한 지지를 유지해나간 건 그가 평시에 경제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여왔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문재인 정부 들어와 한국의 민생경제 상황은 나날이 악화일로를 겪어왔다. 게다가 미합중국은 잠재적인 총체적 국력에서 일본제국을 최소한 서너 번은 너끈히 이기고도 남았다. 이와 달리 일본의 경제 규모는 한국 경제 크기의 3배가량 된다고 한다. 노벨상의 과학 분야 수상자의 숫자를 견주는 게 아예 부질없는 모습에서 보이듯 한일 양국의 기술 격차 또한 엄청나다.
그럼에도 우리가 한 가지 지점에서는 일본과 대등하게 맞설 수가 있다. 기업의 경쟁력 측면이다. 북한이 핵실험을 강행한 지 며칠 안 되어 그전에 외국에 출장을 나갔던 이건희 회장이 귀국하자 국민들 사이에 이젠 안심해도 되겠다는 반응이 광범위하게 일었던 적이 있다.
지금은 삼성을 드러내놓고 부정적 시선으로 바라봤던 인사들마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난국을 타개해줄 것이라고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다. 환언하자면, 청와대로 대표되는 정부에도, 국회로 상징되는 정치권에도 국민들은 아무런 믿음과 희망을 갖고 있지 않다는 의미다.
일본의 부당하고 불법적인 대남 경제제재는 언젠가는 종식될 것이다. 일본과의 관계도 머잖아 개선의 방향으로 반전될 게 분명하다. 우리도 일본 없이는 잃을 게 많지만, 일본 역시 한국 없이는 아쉬운 게 많다. 국가 간의 밀접한 사회경제적 상호의존 체제의 구축은 서구 자본주의가 동구 사회주의와의 체제경쟁에서 최종적 우위를 점할 수 있었던 튼튼한 밑바탕이었음 명심하자.
평상시에는 죽어라 욕하고 저주하다가 어려운 일만 생기면 기업들에게 손 벌리는 짓, 아베의 ‘기습서침’ 이후에는 더 이상 되풀이하지 말자. 평생 나랏돈 한 번 받아본 적 없는 나 같은 사람마저 자본가와 기업인들 앞에서 부끄러워질 지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