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재가 왜 거기서 나와
필자는 한국사회의 평균적이고 전형적인, 온순하고 이름 없는 양민이다. 그런데 과거에 급진적인 운동권 투사들로 과격하고 이름나게 활동했던 지인들을 어찌어찌하다 보니 우연히 “약간 명” 알게 되었다. 그 중에는 이제는 인연이 끝나 더 이상 만나지 않는 인사들도 있고, 변함없이 교유를 이어가는 사람들도 있다.
지금으로부터 4~5년 전쯤, 나는 쟁쟁한 운동권 경력을 지닌 지인과 단 둘이서 밥을 같이 먹을 기회가 있었다. 그는 내가 이인영과 우상호, 임종석과 송영길 등의 학생운동권 출신 586 세대 정치인들의 위선과 타락을 집요하게 질타하자 공개적으로 반론을 제기하는 글을 인터넷에 올렸을 만큼 한국의 사회운동(Social Movement)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남다른 분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적 이념 성향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
그랬던 그가 본격적인 식사가 시작되기에 앞서서 돌연 기독교식으로 기도를 올리는 것이었다. 너무나 예상 밖의 상황이었던 터라 필자는 당혹스러운 마음에 별로 목도 마르지 않으면서 애꿎은 물만 벌컥벌컥 마셨더랬다.
적잖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때의 기억이 갑자기 선연히 떠오른 이유는 젊은 미모의 여성 법조인으로 정치권과 방송가에서 한때 명성을 떨쳤던 강연재 변호사가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담임목사의 대변인으로 뜬금없이 등장한 사건이, 극렬한 운동권 출신의 선배가 느닷없이 식사 자리에서 ‘주님께’ 기도를 바쳤던 일만큼이나 너무나 생뚱맞은 데 있었다. 영락없는 “니가 왜 거기서 나와?”의 경우였다.
“니가 왜 거기서 나와?”는 남성 트로트 가수 영탁이 부른 유행가 제목이기도 하다. 이 노래는 문재인 정권 시대의 모순되고 일그러진 세태와 맞물리면서 공전의 히트를 거뒀다.
추미애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포털 사이트들에서의 댓글공작을 관계당국에 고발하자 여권의 유력한 차기 대선주자인 김경수 경남지사가 드루킹 일당의 여론조작을 배후조종한 혐의자로 나왔다. 평소 사회주의자를 자처해온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은 천민자본주의에 찌든 파렴치한 졸부들이나 자행하거나 혹은 연루될 법한 지저분한 비리들의 공범으로 나왔다. 과도한 다주택을 보유한 기초자치단체장들의 명단을 까보니 집권여당인 더불어민주당 소속의 시장과 구청장이 줄줄이 나왔다. 국민들이 “니가 왜 거기서 나와”라는 분노 반, 탄식 반의 추궁을 문재인 정권을 겨냥해 쏟아낼 수밖에 없는 지경이다.
“니가 왜 거기서 나와”의 압권은 미투(Me Too) 사건의 가해자로 역시나 더불어민주당에 속하는 광역자치단체장들이 연달아 나왔을 때였다. 이로 말미암아 한 명은 초라하게 영어의 몸이 되었고, 또 다른 한 명은 공직에서 수치스럽게 사퇴해야만 했으며, 나머지 한 명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전광훈
강연재 변호사는 “니가 왜 거기서 나와”의 물음표를 여권으로부터 야권으로 방향전환을 시켰다는 점에서 그의 본래 의도가 뭐였건 결과적으로 ‘지능형 대깨문’ 역할을 전광훈 목사만큼이나 충실하고 톡톡하게 해냈다.
필자는 강연재 변호사와 공식적 회의석상에서 서너 차례 대면해본 적이 있다. 그는 격정적이기보다는 차갑고, 부드럽다기보다는 매서운 유형의 성격이었다. 뭐 하나 대충대충 넘어가는 법이 없는, 까칠하고 집요한 인물이었다.
강연재 또한 여느 정치인들처럼 당연히 출세와 성공을 욕망하는 사람이었으나, 그건 크고 유의미한 비판거리가 되지 못한다. 왜냐? 21세기 한국사회에서는, 특히 한국의 여의도 제도권 정치에서는 보수는 성공하기 위해 걷는 길일 뿐이고, 진보는 출세를 목적으로 택하는 노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강연재에게 퍼부어지는 십자포화의 상당 부분은 그의 잦은 당적 변경을 정조준하고 있다. 그는 정당을 빈번하게 갈아탔다. 진보로 출발해, 중도를 거쳐, 보수로 갔다가, 현재는 극우로 변신했다. 거의 갈 데까지 간 셈이다.
그러나 원내에 진입할 수 있는 당선 가능성만 따지면 보수까지가 한계다. 극우로 불리는 아스팔트 보수는 돈은 몰라도 금배지를 달려는 사람이 할 짓은 아니다. 그건 심지어 극우로 분류된 당사자들마저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 그러므로 필자는 강연재 변호사가 마지막 정치적 승부수를 띄우는 차원에서 태극기부대에 자원입대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강연재는 도대체 무엇을 바라고서 전광훈의 수양딸 노릇까지 마다하지 않고 있을까?
필자는 종교적 맥락의 ‘구원’에서 그 해답을 찾고 싶다. 아사하라 쇼코를 좇아 옴 진리교에 빠져든 도쿄대 졸업한, 와세다대 학력의 일본 엘리트들은 교주로부터 세속적인 출세와 성공을 구하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내세에서의 영생을 믿었을 따름이다.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의 음모론을 열심히 퍼뜨리는 이른바 ‘배운 여자들’이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그와 같은 멍청한 짓거리를 저지르는 건 아니다. 그네들은 김어준이 걸핏하면 주장하는 얼토당토않은 음모론을 확산시켜주는 데 앞장서면 본인들도 소위 ‘민주진보개혁자주반일반미’ 진영의 구성원으로 편입, 아니 휴거되어 그동안의 물질적이고 속물적 삶에 대한 면죄부를 받을 수 있다고 확신한다.
잠시 역지사지해보자. 당신이 지난 10년간 정치적 좌절만을 거듭해 경험해왔다고 가정해보시라. 어느 정당의 공천을 받아도 여지없이 선거에서 떨어지기 일쑤였다. 불운하고 고독한 정치 낭인의 아이콘으로 참담하게 전락한 당신을 다른 모든 사람들은 냉정하고 쌀쌀맞게 비웃고 외면하건만, 세간에서 ‘빤스 목사’로 지탄받아온 목회자 한 명만은 마치 길 잃은 어린 양을 보듬어 안는 친절한 목동처럼 따뜻하게 맞아주며 위로와 축복의 중보기도를 직접 수시로 해준다. 개신교에서 말하는 환대다.
이를 계기로 낙선의 반대말이 당선이 아닌 구원임을 처음으로 체험하는 놀라운 희열과 각성의 순간이 도래한다. 전광훈이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시는 죄 많은 영혼의 구원자가 되는 것이다.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그분을 위해 그까짓 수양딸 노릇이 대수겠는가?
필자는 전광훈과 강연재 변호사의 만남은 정치적 만남이 아니라고 평가하련다. 강연재가 아무리 총기가 떨어져도, 현실적으로 도움 되는 사람과 유해한 사람을 구분하지 못할 인물은 아니다. 필자가 판단하기에 전광훈 목사와 강연재 변호사의 영적인 만남은 잘못된 만남도 아니고, 잘못된 만남이 아닌 것도 아닌, 몹시도 기이하고 뒤숭숭한 만남이라고 하겠다. 바야흐로, 길 잃은 양들이 천지사방에 넘쳐나는 시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