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대중독재는 민주주의를 어떻게 말살하는가
  • 공희준 편집위원
  • 등록 2020-09-18 17:32:35

기사수정
  • 변신과 적응의 리더십 : 알키비아데스 (6)

군중과 독재자는 책임지지 않는다.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나치스 전당대회 모습. (사진출처 구글)

시칠리아 원정 부대의 총사령관으로 선출된 인물은 하필이면 신중한 성격의 소유자인 니키아스였다. 이는 민중이 이번 정복전쟁의 무모함과 위험성을 어렴풋이나마 인지했다는 뜻이었다.

 

익명의 군중과 독재적 폭군은 책임지지 않는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니키아스는 민중이 얼마나 변덕스럽고 무책임한 존재인지를 뚜렷이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원정을 중단시키려고 시도했지만 허사에 그치고 말았다.

 

부사령관으로 지명된 알키비아데스는 니키아스의 전쟁불가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하면서 아테네의 더 큰 영광과 보다 나은 발전을 위해서는 이번 기회에 시라쿠사의 무릎을 완전히 꿇려야 한다는 호전적 논리를 펼쳤다. 민중은 작전을 주도할 장군들의 권한을 강화시켜주는 내용의 결의안을 민회에서 채택함으로써 주전파의 손을 들어주었다. 만사가 알키비아데스가 계획한 대로 술술 풀려가는 듯했다.

 

이때 예기치 못한 불길하고 불미스러운 사태가 터졌다. 헤르미스 여신의 조각상이 원정대의 출항을 며칠 남겨둔 시점에서 끔찍한 형태로 손상된 것이다.

 

거룩한 신상을 파괴한 만행이 누구의 소행인지를 둘러싸고 다양한 억측과 소문이 난무하는 와중에 민중파의 지도자인 안드로클레스가 신성한 여신상을 무참하게 난도질한 불경한 짓거리의 범인이 알키비아데스와 그의 측근들이라는 충격적 의혹을 돌연 제기하고 나섰다. 그러자 테살로스가 안드로클레스의 고발을 근거로 담은 알키비아데스 탄핵안을 민회의 안건으로 발의했다. 탄핵을 발의한 테살로스는 귀족파의 거두였던 키몬의 아들이었다. 알키비아데스 타도의 기치 하에 아테네의 좌우 양파가 통일전선을 구축했던 것이다.

 

오늘날에는 폐쇄회로(CC) TV가 지구촌의 웬만한 도시들의 길거리들마다 촘촘하게 설치되어 있는지라 이런 유형의 사건의 경우에는 신속한 진상 규명이 가능하다. 허나 알키비아데스가 시칠리아 원정을 부지런히 준비하던 시기는 서력으로 기원전 5세기 후반 무렵이었다. 따라서 헤르미스 여신상 훼손 사건의 정확한 진실은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플루타르코스는 알키비아데스가 누명을 쓴 것으로 서술하였다. 필자 또한 그와 비슷한 입장을 취하련다. 알키비아데스가 평소에 아무리 별의별 일탈행위를 저질러왔다고 한들 본인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의 생사가 걸린 중차대한 원정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긁어 부스럼 될 일을 굳이 벌일 특별한 동기가 없기 때문이다.

 

알키비아데스를 편드는 세력도 물론 있었다. 시칠리아 원정에 종군하는 병사들은 거의 전부가 그의 결백을 믿었다. 동맹군 자격으로 참여한 아르고스와 만티네이아의 중장보병들도 그가 실제로 탄핵당한다면 자신들은 원정을 보이콧하겠다고 조직적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의 숫자는 1천 명에 달했다. 단 한 명의 병사도 아쉬운 판국인 아테네로서는 함부로 무시할 수 없는 만만찮은 규모였다.

 

알키비아데스의 반대파들은 목표의 수준을 일단은 낮췄다. 반대파는 알키비아데스가 법원에 기소된 현행범 신분으로 전장으로 떠나게끔 하는 게 나라 밖에서의 전쟁 승리와 나라 안에서의 정의 구현에 두루 이바지하는 현명한 결정을 것이라고 민회에 참석한 시민들을 설득해 다수의 동의를 얻어냈다.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군에서 최강의 선봉장이자 최고의 책사였다. 조자룡과 제갈공명의 역할을 그 혼자서 오롯이 감당하는 중이었다. 아테네가 삼단노선만 해도 무려 140척에 이르는 거대한 함대를 편성한 것도, 시민권을 소유한 남성의 5분의 1을 징집해 원정에 동원한 것도 알키비아데스의 지모와 용력을 신뢰하기 때문이었다. 아테네는 원정군 전력의 절반이라고 평가하여도 과언이 아닐 알키비아데스를 탄핵안이 민회에 상정된 상태로 전장에 내보냈다.

 

원정대는 시칠리아 섬이 지척으로 내다보이는 이탈리아 반도의 최남단 도시 레기움을 공략하는 걸로 전역을 개시했다. 원정군 지휘부는 니키아스, 알키비아데스, 라마코스 3인으로 구성되었다. 이들 가운데 라마코스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무모한 행동을 일삼는 자로서 알키비아데스의 통제와 지시에 고분고분 복종하는 꼭두각시와 다름없었다. 최고지휘관 회의가 다수결 구조로 운영되었던 까닭에 알키비아데스의 제안이 언제나 관철되었고, 원정군은 그의 의견대로 메시나 해협을 건너 시칠리아에 상륙한 다음 카타네를 아테네의 세력권 안에 복속시켰다.

 

천하의 알키비아데스도 그의 부재를 틈타 반대파가 모국인 아테네에서 진행하는 전방위적인 음해와 치밀한 정치공작에 맞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알키비아데스가 카타네를 발판으로 삼아 시칠리아 전역을 공략할 궁리에 한창 몰두하던 무렵, 본국에서 급작스럽게 소환장이 날아왔다. 지체 없이 귀국해 재판을 받으라는 명령이었다.

 

알키비아데스는 대중선동에 능수능란했다. 그러나 그의 정적들 역시 각고의 노력과 연구 끝에 그에 못잖은 여론조작의 달인들로 괄목상대한 터였다. 알키비아데스 없이는 지금 당장 나라가 망할 것처럼 아우성을 쳐대던 민중은 그새 마음을 싹 바꾸어 “이게 다 알키비아데스 때문”이라고 도처에서 악을 써댔다. 중우정치 혹은 대중독재는 작게는 고대 아테네의 직접 민주주의 정치에 내재된, 크게는 동서고금을 아우르는 민주주의 체제 일반에 수반되는 치명적 병리현상이다.


알키비아데스 일파가 신상을 모독했다는 혐의에 휩싸인 이유는 달빛 아래에서 범행 현장을 확실히 목격했다는 어느 외국인의 증언에서 비롯되었다. 문제의 증언은 사건이 일어난 밤이 달이 전연 뜨지 않는 그믐밤이었다는 사실로 인해 단박에 명쾌하게 반박되었다. 마녀사냥에 혈안이 된 대중에게 ‘팩트(Fact)’는 처음부터 아예 안중에 없었다. 그러므로 구체적 물증은 막연한 심증에 맥없이 압도당했다.

   

위정자들이 탐욕에 눈멀면 정권이 몰락하지만, 인민대중이 광기에 눈이 멀면 나라 자체가 멸망하기 마련이다. 페리클레스 사후의 아테네는 바로 이러한 패망의 수렁 속으로 깊숙이 빠져들고 있었다.


관련기사
TAG
1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서초구
국민신문고
HOT ISSUE더보기
많이 본 뉴스더보기
  1. 한국체육산업개발-KB국민은행, ESG 상생협력 업무협약 체결 한국체육산업개발(대표이사 신치용)과 KB국민은행(은행장 이재근)은 지난 18일 ESG경영 실천을 위한 상생협력 업무협약을 체결하며 공익적 가치 확산을 위한 협력을 다짐했다.이번 협약식에는 신치용 한국체육산업개발 대표이사와 김경남 KB국민은행 ESG상생 본부장을 비롯한 양 기관 임직원이 참석해, 국민 삶의 질 향상과 행복 증진을 목표..
  2. 마포구, 연말연시 레드로드 인파 운집에 대한 안전관리 실시 서울특별시 마포구(구청장 박강수)는 2024년 연말연시를 맞아 12월 24일부터 31일까지 경찰, 소방 등 유관기관과 함께 `레드로드 다중운집행사 안전관리`를 실시한다.구는 2023년 연말 홍대관광특구 시간대별 밀집 인원 데이터를 바탕으로 올해 5만에서 9만 명의 인파가 레드로드로 몰릴 것으로 예상하고 `다중인파 운집 대비 전담반`을 구성했다...
  3. KT, 연말 맞아 지니 TV 고객 감사 이벤트 `풍성` KT(대표이사 김영섭)가 다가오는 크리스마스 연휴와 연말을 맞아 지니 TV 고객들을 위한 풍성한 이벤트와 혜택을 마련했다고 20일 밝혔다.KT는 2024년 인기 콘텐츠를 엄선해 특집관을 마련하고 콘텐츠를 즐긴 고객들을 위한 다양한 경품 이벤트를 연다. 또 연휴를 맞아 `몰아보기`를 할 수 있도록 무료 또는 할인된 가격에 콘텐츠를 제공할 예정.
  4. 국토교통부, 해외건설 수주 지원 강화…"민관합동으로 고부가가치 시장 공략" 국토교통부는 19일 서울 해외건설협회에서 해외건설시장 동향 점검회의를 열고, 기업의 수주 현황과 애로사항을 점검하며, 민관합동 수주지원단 운영 및 투자개발사업 지원 방안을 논의했다.국토교통부는 19일 오전 진현환 차관 주재로 서울 해외건설협회에서 ‘해외건설시장 동향 점검회의’를 열고, 국내 건설기업의 해외 수주 동..
  5. 양천구, 이용률 저조한 작은 도서관 `북카페`로 새단장 양천구(구청장 이기재)는 이용률이 저조하던 목3동 주민센터 내 작은 도서관을 독서, 문화, 소통이 함께 어우러지는 주민 복합문화공간 `목3 북카페`로 새단장하고, 이달 23일부터 운영을 시작한다고 밝혔다.목3동 주민센터 2층에 위치한 `목3 북카페`는 하루 평균 방문 인원이 열 명이 안 될 정도로 이용률이 저조했던 기존 도서관을 주민 중심...
  6. ‘챗GPT 국내 일자리 10% 채운다’ 슈퍼코딩, AI 100% 취업 연계 교육프로그램 론칭 국내 개발자 채용 시장에서 챗GPT 인공지능(AI) 인재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2024년 3분기 기준 개발직군 채용 공고 중 AI 역량을 요구하는 비중은 43.6%로, 전년 동기 대비 증가했다. AI 엔지니어의 평균 연봉은 7770만 원으로, 비AI 개발자 평균 연봉인 7389만 원을 상회하고 있다. 이는 AI 기술에 대한 기업들의 높은 수요를 반영하며, AI 역량..
  7. 금천구, 여성친화도시 2회 연속 지정 금천구(구청장 유성훈)는 여성가족부로부터 여성친화도시로 2019년에 이어 2회 연속 지정되는 성과를 거뒀다고 밝혔다.여성친화도시는 지역 정책과 발전과정에 성별 균형을 이루고, 여성의 역량 강화, 돌봄 및 안전이 구현되도록 정책을 운용하는 도시를 말한다. 여성친화도시는 5년마다 여성가족부의 심사를 거쳐 선정된다.2회 연속 지정은 ...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