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키비아데스에 대한 추방령은 이미 진즉에 철회된 상태였다. 그는 고국으로 귀국하고 나서야 비로소 이런 사실을 인지했다. 추방령이 해제되면서 그를 겨냥한 사제들의 극악한 저주도 나란히 풀렸다. 아테네인들은 구국의 영웅을 그동안 박해하고 미워한 게 미안했는지 민회를 소집해 그에게 연설 기회를 마련해주는 것에 더하여 알키비아데스를 육해군 총사령관으로 추대하였다. 바야흐로 가히 ‘알키비아데스의 시간’이었다.
인생 최고의 나날을 맞이한 알키비아데스는 그가 경험한 역경과 굴욕을 아테네인들의 무지와 배은망덕 탓으로 돌리지 않았다. 단지 잠시 운이 나빴을 뿐이라는 식으로 민중에게 화해와 용서의 손길을 내밀었다. 그는 아테네 시민들에게 자애로운 표정을 지은 것과는 판이하게 스파르타를 향해선 신랄한 조롱과 비난을 맹렬하게 퍼부었다.
플루타르코스는 알키비아데스가 귀국 날짜를 잘못 택일했다고 지적하였다. 하필이면 그날이 신상을 청소하는 날이었던 것이다. 고대의 아테네 사람들은 신상을 소제하는 날을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날로 여겼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는 저자에게는 중요했겠지만, 유라시아 대륙의 정반대편에서 후세를 살아가는 21세기 한국인들에게는 별다른 의미도, 흥미도 없을 내용이 상당수 존재한다. 필자는 고대 그리스의 풍습에 특별히 관심이 지대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러한 부분은 간단히 건너뛰어도 된다고 감히 권유하련다. 단적으로, 우리가 삼국지를 읽으면서 유비와 관우와 장비의 복잡한 여자관계까지 구태여 속속들이 파악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엘레우시스는 아테네에서 서쪽으로 20여 킬로미터 가량 떨어져 있는 도시이다. 이곳에서는 아테네인들에게는 목숨만큼이나 소중한 제례인 엘레우시스 밀교 의식이 대대로 치려져 왔다. 페리클레스의 죽음과 시칠리아 원정의 대실패를 차례로 겪으며 아테네의 위신과 세력은 예전에는 자기 집 안방처럼 자유롭게 왕래하던 엘레우시스조차 안심하고 다녀오지 못할 지경으로 크게 쪼그라져 있었다.
알키비아데스는 이제는 승조원으로 꽉 찬 100척의 삼단노선을 부릴 수가 있었다. 자신감을 얻은 그는 엘레우시스에서의 밀교 의식을 재개함으로써 아테네의 국가적 위신을 되찾을 계획을 세웠다.
알키비아데스의 인솔을 받으며 엘레우시스로 가는 집단의 규모와 형태는 제례를 올리려는 성직자들의 무리보다는 행진하는 군대의 대열에 가까웠다. 만일 발생할지도 모를 적군과의 충돌을 대비해 수많은 호위병들이 행렬에 붙었기 때문이다.
히틀러의 독일군이 1936년 3월 라인란트로 행군할 당시, 프랑스군이 개입해 양국 사이에 교전이 벌어졌다면 백이면 백 독일이 일방적으로 완패했을 것으로 현대의 군사평론가들은 분석하고 있다. 전년도인 1935년에 재무장을 비록 선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군비는 프랑스를 상대할 수 있는 수준으로는 아직 확충되지 않았던 이유에서였다. 히틀러는 힘이 아닌 깡으로 서구 열강들을 이겼다.
전통적 제례의 구실 하에 엘레우시스로의 행군을 감행한 알키비아데스는 정신력의 일종인 깡뿐만이 아니라, 객관적인 물리력에서도 적군을 압도하였다. 알키비아데스 기획과 총연출 아래 제례가 예전처럼 성대하고 무사하게 치러진 사건은 아테네가 스파르타와 양강 체제를 형성하며 그리스 세계를 호령하는 강국으로서의 위상과 국력을 완전히 회복했음을 대내외에 공식적으로 선포하는 중차대한 일이었다. 나치스 제3제국의 라인란트 진주와 베를린 올림픽 개최 두 가지를 결합해놓은 이벤트가 엘레우시스 밀교 행사의 재개였던 셈이다.
지식인은 진리에 반응하고, 대중은 힘에 열광한다. 인류사의 오래된 불편한 진실이다. 독일군의 라인란트 접수와 1936년의 베를린 하계 올림픽이 히틀러의 독재권력을 대폭 강화했듯이, 엘레우시스의 제례의 정상화는 알키비아데스의 지지기반을 넓히는 데 톡톡히 기여하였다. 그러자 아테네 일각에서 그를 참주로 옹립하려는 움직임이 노골적으로 대두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강력한 참주정이 출현해 탐욕스러운 정상배들과 비루한 기회주의자들이 판치는 아테네를 처음부터 아예 깨끗하게 새판 짜기를 해주기 바랐다.
알키비아데스는 히틀러가 아니었다. 그는 히틀러처럼 무수한 동포들을 도륙하면서까지 정권을 창출해 유지하고 싶지는 않았다. 설령 그가 히틀러 같은 철권통치자가 되기를 진짜로 원했다 하여도 이는 현실여건상 불가능한 노릇이었다. 그러기에는 지지자들은 너무나 적고 약했으며, 반대자들은 지나치게 많고 강했다.
그는 정치적으로 최악의 시기에 함대를 이끌고 출전했다. 그가 국내정치적 지반과 입지를 공고히 다지길 바랐다면 아테네에 좀 더 오랫동안 머물러야 옳았다. 참주가 되려고 한다는 세간의 의구심을 불식하고 싶었다면 보다 일찍 바다를 통해 출국해야만 마땅했다.
서전은 순조로웠다. 그가 지휘하는 함대는 에게 해 한가운데 자리한 안드로스 섬을 공격해 섬의 주민들은 물론이고 현지에 주둔하던 스파르타 파견군의 병사들로부터도 손쉽게 항복을 받아냈다. 그러나 그는 섬 자체를 영구적으로 정복하는 단계까지는 나아가지 않았다.
프로야구 2018년 한국 시리즈에서 두산 베어스는 SK 와이번스에게 우승을 내어주고 말았다. 어우두, 즉 “어차피 우승은 두산”이라는 구단과 팬들의 팽만한 기대감이 과도한 압박감으로 작용해 선수들의 경기력을 오히려 저하시킨 탓이었다. 이 무렵 아테네 사회에서는 ‘어승알’이라는 이야기가 공공연히 나돌았다. “어차피 승자는 알키비아데스”라는 철석같은 믿음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알키비아데스가 이전과는 다르게 속전속결로 연전연승을 거두지 못하자 그를 의심과 불신이 서린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알키비아데스가 일부러 태업을 하고 있다는 의혹마저 공공연히 나돌 정도였다.
그런데 아테네인들이 결정적으로 간과한 부분이 있었다. 바로 돈, 즉 군비였다. 스파르타는 페르시아 국왕 키로스로부터 거의 무제한의 대출과 융자를 무이자로 받아가며 전투에 임했다. 반대로, 알키비아데스는 동맹국의 후원은커녕 본국의 지원마저 기대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로 말미암아 그는 무찌를 적군을 찾는 일보다 병사들에게 줄 급료를 구하는 데에 더 신경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당장 아테네 수병의 월급은 스파르타 선원들이 받는 월급의 7할을 약간 웃도는 수준이었고, 이마저 제때 지급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알키비아데스는 총사령관에 최고경영자(CEO) 역할까지 겸하고 있었다. 병사들의 월급날이 임박하자 다시금 골머리를 앓게 된 그는 함대의 지휘권을 부하장수인 안티오코스에 잠시 맡기고서 지금의 터키 서해안에 소재한 카리아로 떠나야만 했다. 문제는 이름을 고려하건대 그리스인들 관점에서는 북방의 오랑캐 땅인 마케도니아 또는 트라키아 출신으로 추정되는 이 안티오코스란 사내가 용맹함과 견주어 지모는 심각히 달리는 인물이었다는 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