쇄신 대신에 문재인
오늘 오전에 롯데백화점 잠실점 근처를 지나가는데 문재인 대통령의 사진이 큼지막하게 들어간 현수막이 도로변에 내걸린 광경이 필자에게 목격되었다. 문재인 정부 출범 4주년을 기념한다며 더불어민주당 송파을 지역위원회(위원장 최재성)가 걸어놓은 현수막이었다.
1987년 이후의 우리나라 제도정치권에서 명멸한 수많은 정당들 중에서 더불어민주당이 당내의 이견과 반론을 단연 가장 철저하게 금압하는 전체주의적이고 획일주의적인 정당임을 감안하면 해당 현수막은 다른 지역구들에도 동일한 크기와 내용으로 게첩됐을 것으로 짐작된다. 집권여당의 당권을 장악한 당권파의 사전 허락 없이는 당 공식 누리집의 배너 광고 하나 마음대로 바꾸지 못하는 정당이 현재의 더불어민주당일 터이기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은 지금부터 겨우 한 달 전쯤 치러진 서울시장과 부산시장 보궐선거 국면에서는 문재인 대통령을 전면에 내세우지 못했다. 그 정도로 문재인 대통령은 호남을 제외한 다른 곳들에선 인기가 없었다. 임기 말기의 문 대통령 또한 탄핵 직전의 박근혜 전 대통령만큼이나 심각하게 인심을 잃었다는 증좌였다.
이해찬 전 국무총리를 비롯한 다수의 여권 실력자들이 판세가 박빙일 것이라고 예측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투표함을 열어보니 선거 결과는 야당인 국민의힘의 압승이었다. 국제 규격의 공항 부지로 활용되기에는 이미 오래전에 부적격 판정을 받은 가덕도 땅에다가 수십조 원의 혈세를 퍼부어 신공항을 지어주겠다는 달콤한 약속도, 국민의힘 오세훈 후보의 얼굴에 연일 시뻘건 생태탕 국물을 쏟아 붓는 희대의 네거티브 선거전도 유권자들의 문재인 정권 심판 정서를 뒤집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그렇다면 4ㆍ7 보궐선거 이후 민심의 향방을 근본적으로 반전시킬 만한 특별한 계기라도 발생했던 것일까? 물론 아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백신은 언제 재고가 떨어질지 모르는 상황이고, 서민들의 민생경제는 나날이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 김남국과 김용민 두 초선 국회의원 같은 문재인 정권을 대표하는 내로라하는 막말꾼들의 듣기 민망한 소음공해의 막말 행진은 좀처럼 멈출 기세를 보이지 않는다.
대통령의 말하기가 실패하지 않으려면
그러나 더불어민주당은 과감한 변화와 혁신 대신에 타성적으로 ‘도로 문재인’을 안일하게 택했다. 국민들 입장에서는 여태껏 한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단군 이래 최초의 엽기 여당인 셈이다.
문제는 이른바 ‘문재인 카드’로 지금의 총체적 난국을 돌파하기에는 문재인 대통령의 대국민 이미지에 너무나 많은 흠집이 났다는 점이다. 그 흠집들에서 야당과 언론이 책임져야만 할 부분은 1할 남짓에 불과하다. 나머지 8할의 몫은 문재인 정권의 전반적인 메시지 전략의 실패로부터 기인하고 있다.
‘대통령의 말하기’에는 결코 흔들려서는 안 될 두 가지 대원칙이 존재한다. 첫째는 내치를 다룰 때 관대하게 말해야 한다는 거다. 둘째는 외교에 임할 때 위대하게 들려야 한다는 것이다.
국내정치와 관련해 대통령은 누가 자기를 어떻게 씹고 욕하든 간에 일단은 품 넓고 인자한, 아량 있는 모습을 보여야만 한다. 분하고 억울한 일이 있으면 관저로 돌아가 혼자 이불 뒤집어쓴 다음에 이불킥하는 것으로 풀면 된다.
외치에 나선 대통령은 시종일관 의연하고 강건한 면모를 과시해야만 옳다. 사실, 한국을 둘러싼 국가들 가운데 대한민국과 비교해 객관적 국력이 달리는 나라는 북한 딱 한 개뿐이다. 그 비실비실한 북한마저 이제는 절대무기로 불리는 핵무기로 중무장하고 있다. 두렵고 끔찍한 노릇이 아닐 수가 없다. 허나 대통령은 무섭고 외로운 속내를 심지어 배우자인 영부인 앞에서조차 드러내서는 안 된다.
대통령의 메시지는 대통령 자신의 입이나 본인 명의의 글을 통해서만 발신되는 건 아니다. 청와대 참모들이 발표한 성명과 논평 역시 대통령의 뜻으로 해석되기 마련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청와대가 근자에 내보내는 메시지는 올바르고 효과적인 메시지가 반드시 견지해야 할 원칙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폭주하고 있다.
국민을 상대할 시의 문재인 대통령의 메시지는 한마디로 지질하다. 현직 대통령도 다른 마땅한 대안이 없으면 국민을 고소ㆍ고발할 수는 있다. 관건은 문재인 정권의 고질병인 내로남불이 이번 경우에도 일말의 예외 없이 발동했다는 사실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이끄는 더불어민주당이 야당이었을 적에 그들은 이명박 정권과 박근혜 정권을 향해 국민을 고소하는 지질한 정권이라는 투로 맹비난을 가했었다.
더욱더 가관은 박경미 청와대 대변인이 은근슬쩍 소개한 대통령의 의중이다. 기분 나쁘면 또 고소하겠다는 게 박 대변인이 밝힌 문재인 대통령의 솔직한 심경인 것이다. 일반인들이 유흥가의 주점에서 술 먹다가 시비 붙었을 때 상대방이 자기 때렸다고 112에 고래고래 신고하는 사건이 자연스럽게 겹치는 대목이다.
반면에 문재인 대통령이 북한과 미국, 중국과 러시아를 대할 적에 말과 행동으로 발송한 이런저런 직간접적 메시지는 엄청 유약하기 짝이 없었다. 대화로 부드럽게 풀어갈 현안과 쟁점이 있으면 물밑에서 외교관들 시켜서 진행하면 충분하다. 대통령은 독립된 주권국가의 수장으로서의 당당함을 피력하면 된다.
그런데 문재인 대통령은 러시아와 중국, 미국과 북한 모두에 골고루 나약하고 굴종적 자세를 취했다. 그나마 일본에는 한때 강경했지만 국내정치적 유불리를 염두에 두고 사안에 따라 선별적으로 펼쳐온 반일정책의 효용성이 작금에는 약발이 다했다고 판단했는지 최근 들어서는 청와대가 일본을 겨냥해 대립각을 세우는 일이 크게 줄어들었다. 은밀해야 할 때는 되레 요란해지고, 요란해야 할 때는 외려 은밀해지니 대통령이 말을 하면 할수록, 글을 올리면 올릴수록 통치권자로서의 권위가 그와 반비례해 하염없이 추락해왔다.
권력에는 임기가 있지만, 권위에는 임기가 없는 법이다. 대통령의 말하기의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까닭이다. 안으로 지질하고 밖으로는 왜소해진 문재인 대통령의 실패한 메시지 전략을 반면교사로 삼아, 국민에게는 관대하고 외국에게는 위대한 메시지를 날릴 줄 아는 유능하고 책임감 있는 정치 지도자가 더 늦기 전에 출현하기를 염원하는 건 단지 필자 혼자만의 일방적인 희망사항은 아닐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