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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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치는 왜 비루해졌나 : 비루함의 평범성
비루함의 종횡무진풍경 1 : 옷값 1~2만 원 아끼려고 유니클로 매장에만 드나들어도 마치 일본에 나라 팔아먹은 이완용이라도 되는 양 거칠게 몰아가던 분위기였다. 그런데 이런 험악한 분위기를 주도적으로 조성한 문재인 정부의 전직 청와대 참모가 알고 보니 일제 고급 자동차 브랜드의 대명사인 렉서스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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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센터 없는 선거전, 한국정치의 뉴노멀
공식선거운동 기간에 전화를 통한 선거운동을 담당하는 콜센터는 후보들의 선거 캠페인에서는 필요악 같은 존재다. 유권자들은 자신들에게 원치 않는 전화를 귀찮게 걸어오는 콜센터를 낡고 부패한 고비용-저효율 정치의 원흉들 가운데 하나로 관성적으로 욕하기 쉽다, 그러나 콜센터를 활용하는 선거운동은 낮은 투표율을 끌어올리는 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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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의 오버, 문재인의 엄살
처칠은 왜 성질을 부리지 않았을까처칠과 루스벨트는 나라를 이끌며 크고 작은 잘못을 저질렀다. 처칠의 집권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이 겪은 고난의 끝이 아니었다. 본격적인 시련의 시작일 뿐이었다. 영국군은 서유럽의 평원에서, 북아프리카의 사막에서, 동남아시아의 정글에서 쉴 새 없이 참패했다. 이러한 일련의 패퇴에는 처칠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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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남에는 왜 사재기가 없을까
사재기는 탐욕과 더불어 한때 강남 아줌마들 사회의 전매특허였다. 한반도에서 남북한 사이에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면 강남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중심으로 생수와 쌀과 라면과 밀가루와 기초의약품 등의 생활필수품 사재기가 기승을 부린다는 뉴스가 어김없이 신문방송을 타곤 했었다.그런데 압구정동과 대치동처럼 만인으로부터 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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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권, 무책임하니까 무능하다
대통령은 정치인 중의 정치인변호사와 회계사, 과학자와 공학자, 의사와 간호사 등의 전문직 종사자들은 유능해야 한다. 이들의 유능함은 학위와 자격증으로 보장되는 전문성과 풍부한 현장 경험에서 연유한다.의료 분야를 예로 들어보자. 개별적 의료사고는 의사 개인 혹은 특정 병원에 책임을 묻는다. 환자의 진료를 책임진 전문가로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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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먼과 문재인은 이렇게 달랐다
트루만은 어떻게 성공한 대통령이 되었나“The buck stops here!”“내가 다 책임진다”는 의미의 영어 문장이다.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뒤를 이어 미합중국의 제33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해리 트루먼은 위에 적힌 문구를 백악관 집무실 안에 놓인 자기 책상 위에 임기 내개 붙여놨다고 한다.해리 트루먼 이후로 미국에서는 고등학교 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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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와 문재인 (1)
사이비종교 앞에는 무능한 정권이 있다“외교가 실패한 곳에서 전쟁은 시작된다.”국제정치학계에서 정설로 통용되어온 명제다. “국가가 실패한 곳에서 종교가 발흥한다.”대부분의 종교인들이 속으로는 수긍해도 차마 대놓고 입으로 발설하지는 못하는 진실이다.이스라엘 왕국의 쇠락이 있었기에 예수의 가르침이 나왔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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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당’이 어때서 (2)
호남당, 이제는 만들 수 있다“여당도 영남, 야당도 영남” 구도의 강고한 영남패권주의 체제에서 호남당을 한다는 건 정치적으로 자살행위와 다름없는 짓이었다, 호남인들이 호남당을 되레 극력 기피해온 역설적 현상의 근본적 배경이었다.세상은 미처 예상 못한 엉뚱한 지점에서 돌파구가 트이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미국 독립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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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당’이 어때서 (1)
문재인 정권은 호남 정권이 맞다문재인 정권은 권력의 상층부는 부산경남 출신의 출세하고 성공한 엘리트들이 구성하되, 기층의 지지기반은 호남 태생의 평범한 유권자들로 이뤄지는 대단히 특이한 분업체계를 형성해왔다. 호남 유권자들은 부산경남 출신 엘리트들에게 실질적 형태의 부와 권력과 명예를 제공한다. 부산경남 엘리트들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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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왜 ‘방구석 여포’가 되었나
우리도 국가의 근육을 키워야 한다. 필자는 “국가의 근육을 키워서 대한민국을 내로라하는 강대국으로 발전시키겠다”고 말이나마 해주는 정치 지도자가 등장하길 간절히 염원하고 있다. 일개 주한 러시아 대사관 무관의 이야기 한 마디, 한 마디에 어제는 집권세력이 정신승리하고, 오늘은 야당들이 정신승리하는 이 참담하고 부끄러운 꼬락서니를 도대체 언제까지 다들 우두커니 바라만 보고 있을 참인가